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

생존자 증언

길원옥 할머니 약력

1928년 평안북도 희천 출생(주민등록상 출생연도는 1927년)

1940년 (13세)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군‘위안부’ 생활

1941년 (14세) 성병에 걸려 귀국

1942년경 (15세) 중국 석가장에서 다시 일본군‘위안부’ 생활

1945년 (18세) 인천으로 귀국

귀국 후 밀주 제조, 만물상, 도매상 등으로 생계 유지

1998년 (71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2004년~ 정대협 운영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거주

주요 해외 증언 정리

2003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참가

2006년~2009년 호주 국회 결의안 채택을 위한 캠페인

2007년 유럽의회 결의안 채택을 위한 4개국(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영국) 순회 캠페인

2008년 일본 오사카 지역 시의회 결의 채택을 위한 순회 캠페인

2009년 미국 하원 결의안 채택 2주년 심포지엄

2010년 일본 오사카 아마가사키 (尼崎)시 결의채택을 위한 증언집회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입법해결을 위한 일본 국회 원내 집회

2013년 일본전국순회증언집회

증언 6집 -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서울: 여성과 인권, 2004)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되짚어 보려고 해도 상상도 안 되고 그러면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다. 그런 무서운 얘기를 다 기억을 했다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을 거다.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위로받고 그렇게 살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자기들이 직접 당하지 않았어도 당하는 걸 보기만 하는 사람도 몸서리가 날 정도였을 것이다. 자식도 못 낳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건 하나도 못해봤다.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지 못하고 어떻게 그냥 누구 말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다 세월이.

벌금

나는 평북에서 태어났는데 아주 어렸을 때 평양시로 나왔다. 우리 오빠 이불짐 위에 나를 태워서 냇가를 건넜던 기억이 난다. 그것만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으로 보아 네다섯 살이나 대여섯 살 쯤인 것 같다. 우리가 오남매였는데 위로 오라버니가 둘, 언니가 하나, 나,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약주를 과하게 하시고, 외박을 잘 하시는 분이었나 보다. 아버지가 주로 돌아다니셨다. 얼마 있다가 아버지가 오시고 같이 사는 동안에 고물상을 했다. 그 전에 엄마는 지금으로 하면 생선노점, 생선 방문장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평양시 암동에서 고물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를 학교에 넣어 준 것 같다. 학교 갔다 오니까 소란하고 야단스러웠다. 고물상을 하다가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둑놈 물건을 사면 산 사람이 붙잡혀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때도 그렇게 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집안이 파탄이 나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한 일 년 이상 이 년 정도 학교를 다닌 것 같다. 오빠들도 학교에 많이 못 다녔다. 큰 오빠는 평북 희천에서 살다가 나와서 살기가 힘드니까 그냥 엄마를 도와서 일만 하려고 애썼지 공부하는 걸 못 봤다.

고물상 하던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학교는 못 가게 된 나는 많이 까불었나보다. 그러니까 누가 권번에 가서 배우라고 안 배운 사람하고는 다르다고 거길 넣어 주었다. 옛날에는 채 맞은 기생, 채 안 맞은 기생이라 그랬다. 권번에 가서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을 구별해서 권번을 졸업한 사람을 채 맞은 기생이라고 했다. 평양기생이라는 소리가 거기서 나왔다. 거기 가서 서도를 조금 배웠는데 뜻은 몰랐다. 몇 달 다니다가 오빠한테 들켜서 많이 맞았다. 내가 좀 까분다고 그럴까 나이 열 세 살에 뭘 안다고 그런 델 갔는지 모르겠다.

그때가 열두 살이나 열세 살 초반 쯤 됐을 것이다. 권번을 다니다가 오른손 엄지손을 앓게 되어서 장구도 못치게 되자 거기에 있던 여자랑 같이 돈벌러 가자고 만주로 갔다. 아버지 감옥소 벌금이 그때 돈으로 이십 원인지 그런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벌어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랑 같이 철없이 이십 원 가지면 우리 아버지 나온다고만 생각하고 돈을 번다니까 가자고 해서 갔나 보다. 팔려간 것인지 어떻게 해서 간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열세 살이었다. 두만강을 건너서 만주로 갔다.

오꼬네 수술

갈 때 여럿이서 갔는데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거기에선 일체 한국사람은 볼 수 없었고 일본사람도 군인들만 왔다 갔다 하는데 엄청 추웠던 기억만 난다. 그렇게 추웠던 생각만 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라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처음 갔을 때 힘든 얘기는 하나마나한 얘기고 아마 주인 할머니가 무서운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사람만 보였다 하면 군인들 볼 때 떨리는 것 이상으로 겁이 났다. 원래 어린 아이에게 무리가 되어서 그랬는지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성병, 요꼬네라는 병에 걸렸다. 한국말로 가래톳이라고 양쪽에 생겼다.

열이 많이 나고 손님도 못 받았다. 병에 걸려 도저히 부려먹지 못하니까 수술을 시켰다. 그런데 그 수술이 너무 잔인한 것이었다. 일본사람들, 저희들 딸, 저희 고향의 딸이라면 그런 짓을 안 했을 것이다. 양쪽을 수술하면서 나팔관을 막아놓았다. 그래서 그게 이십 세가 넘으니까 난소난종이라는 혹이 주먹만하게 양쪽 뱃 속에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십오 세 안쪽에 병신은 다 된 것이었다. 양쪽 다리 수술을 받았으니 걸음도 잘 못 걸었다. 나쁜 기운이 들어가서 낫질 않았다. 잘 안 낫고 자기들이 일을 못 시키니까 거기에 있던 한국 남자를 딸려서 나를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나를 못 부려먹으니까 데리고 온 사람에게 막 야단을 했다. 그 사람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고 병이 나서 못 하는 것을 어떡하냐며 나를 도와주려고 얘기를 잘 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 겁도 없이 그 사람이 집에 데려다 준다니까 따라 나왔다. 그 사람이 군인인지 잘 몰랐지만 한 번도 안 보던 사람인데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때는 증명이 없이는 들어가고 나가고 하지 못하는 데였다. 지금으로 하면 여행증명서나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이 있어야 했다. 그때도 내가 혼자 맘대로 중국이나 만주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포주라고 관리하는 여자가 증명을 뭐라고 해서 내보냈는지 또렷이 기억은 안 난다.

귀향

엄마는 내가 만주에 갔다 와서도 생선장사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만주에서 병이 들어서 집에 온 뒤로 얼마 있다가 언니는 시집을 간 것 같다. 무엇을 하건 쌀밥이 아니라 밤낮 조밥, 보리밥도 아닌 조밥을 했다. 언니가 시집가고 없어서 어렸지만 내가 부뚜막에 올라 앉아서 밤낮 조밥을 해댔다. 나무가 없으니까 나무도 주우러 다녔다. 우리집에서 얼마 안 가서 일본 사람들 총 만드는 부대가 있었다. 집은 가난하고 어려우니까 그런 데 안 가고 여기서 돈을 벌려고 부대에도 다닌 것 같다. 아침에 줄을 서면 노인네도 있고 애들도 있고 그 날 일 할 수 있는 사람만큼 몇 사람만 들어갔다.

이름을 부르고 허리띠를 주었다. 그것 없이는 못 다녔다. 총알을 만들고 닦고 하는 데였다. 권번에 다니던 친구들하고 만났다. 내가 부대에서 몇 시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애들이 길목을 지켰다가 저희들 옷을 빌려주어서, 각 영업집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몰라도 전에는 권번에 다니는 사람은 문 열고 들어가는 것부터 벌써 달랐다. 그러니까 친구들끼리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중국으로 가면 이제 편안하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하니까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데를 안 간다고 했던 것이 또 그런 데로 가게 된 것이다.

다시 중국으로

중국 북부로 갈 때에는 압록강을 건넜다. 내 친구랑 둘이 가게 되었다. 언제 간다는 얘기를 듣고서 평양역에 가보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우리는 권번에 다니던 사람이니까 지금으로 하면 술집에서 노래하고 술 팔러 가는 것인 줄만 알았지 그런 데는 아닌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좀 둔했던지 아둔했는지…. 함께 가는 사람들도 거기 들어앉기 전엔 몰랐는데 집에서 알 리가 없었다. 그런 데는 아닌 줄 알았다. 두 번째 갈 때는 더군다나 완전히 모르고 갔는데 왜냐하면 먼저 그런데서 되게 힘들었으니까 알고 갔을 리가 없는 것이다. 모르니까 가게 되었다.

만주로 갈 때는 몰라서 갔지만 돌아와서는 그런 데 안 가려고 부대에까지 다니면서 일을 다니고 막일을 했는데 왜 또 중국엘 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중국에 가게 된 걸 우리 엄마가 알았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떠날 때 주황색 저고리와 초록 치마, 유똥 치마를 해줬다. 그걸 왜 해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노래 부르러 간다니까 치마 저고리 한 벌을 해준 건지 모르겠다. 그때는 나한테 치마저고리를 해 줄 만큼 우리집이 넉넉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감옥에서 방금 나오고, 언니는 시집가고 해서 뭘 해줄 수가 없었을 텐데 엄마가 노래를 하러 간다니까 해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남북통일이 되어서 만나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제 육십 년이 넘었으니까 엄마 아버지는 다 돌아가셨을 것이다. 나 혼자만 간 건 아니었다. 여럿이 나마창인지 석가장인지 이름을 잘 기억 못하겠는데 거기서 하룬가 지냈다. 처음에 나온 밥이 쌀밥에다 된장국에 소고기 넣고 끓여주었던 생각이 난다. 왜된장에다가 시금치 국을 끓였는데 고기를 넓적젋적하게 써는 게 아니고, 몽땅몽땅하게 썰어서 국을 끓여 주는데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그걸 먹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나고 그렇게 눈물이 났다. 나는 쌀밥에 고기국을 먹는데 우리집 식구들은 다 뭐 먹고 살까, 좁쌀만 먹고 살겠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차에 시달리면서 가서 배가 고팠을텐데도 그렇게 먹지를 못하고 집안 생각을 하니까 그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울다시피했다. 또 그런 델 왔다는 것을 거기 가서 알았다. 처음에 그 시금치국 끓여주던 집에서 거기로 갈 때 안 간다고 했다. 그런 데는 안 간다고 하고 그때까지도 한국 남자가 있었는데 안 가려면 그 남자가 돈을 많이 줘야 하는데 뭘로 줄 거냐고 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위협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럼 그 집이 노래하는 집인지, 술 파는 집인지 뭐 하는 집이냐고 자꾸 물어보니까 술 파는 데라니까 말이 많다고 야단을 쳤다.

도키와

가서 보니까 술은 한 잔도 안 팔고 사람 구경은 하나도 못하고 오는 사람은 순전히 일본사람이었다. 내가 있던 곳이 도키와라는 데였다. 자꾸 반항만 하니까 니가 반항할 주제가 되냐고 주인이 미워했다. 자유가 없었다. 외출을 전혀 못했다. 낮에도 그 사람들이 들이닥치면 어쩔 수 없었다. 군인들은 대개 아침은 아니고 오후 시간부터 저녁까지가 더 많았다. 아침에 좀 늦잠을 자고 화장을 덜 하고 있으면 감시하는 여자들이 쫓아다니면서 지금이 몇 신데 화장을 덜하고 있냐고 그 얼굴로 손님을 대하겠냐고 야단치던 생각이 난다.

홀 같은 곳에 가장자리로 삥- 둘러서 의자가 있는데 화장을 하고 거기에 앉아 있던 생각이 난다. 거기서 살피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 사람들이 척 들어와서 하는 행동을 보면 누구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누구 아무데로 가’ 그러고 ‘누구’ 하고 이름 부르면 자기 방으로 가야했다. 그러다 보면 의자에 나가 다시 앉을 때도 있지만 그건 여간해서 드문 일이고, 채 씻기도 전에 사람이 또 들어오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힘이 들었다. 아마 들어오면서 군인들이 표를 사고 들어오는지, 표를 내밀면 그냥 들어갔다.

우리한테는 그냥 그 표만 가지고 들어오고 나는 그 표를 매표소에 갖다 내야 된다. 돈은 한 번도 못 받아 봤다. 일본사람 중에서도 술을 안 먹은 사람은 덜 무서운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 너무 무서웠다. 술 취한 사람 목소리만 나도 무서워서 아유 저 사람은 나를 좀 안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술 먹은 사람은 그렇게 무섭다.

폭력

얼른 끝내지도 않고 사람 애를 먹이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죽거나 말거나 오래도록 제 욕심 채우기 위해 하니까 힘이 들었다. 숫자도 잘 모르겠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진짜 밑에 씻어 내기가 바쁠 정도였다. 피가 나거나 견디기 힘들 정도면 반항을 좀 했다. 그러면 반항한다고 두드려 맞았다. 일본군도을 빼지 않고 그냥 내리쳐서 정수리에 흉터가 생겼다. 칼집을 빼서 내리쳤으면 죽었을 것이다. 옷이 피에 젖어서 벗기지를 못하고 찢어냈었다. 지금까지도 흉터가 크다. 이렇게 당하지 말고 죽었으면 하는 때도 몇 번 있었다.

한번 으악- 하고 내려친 사람이나, 모질게 시간을 끌면서 사람을 애먹인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 사람들에게 원한이 생기지만 도대체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다 잊고 싶다. 나는 좀 미련스러웠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 다시 잡아와서 패고 그랬던 기억이 남는데 나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냥 어떻게 하면 고향엘 갈까, 어떻게 하면 주인 마음에 들어 고향에 보내줄까 이렇게만 생각했다. 만일 삼십 명이나 있는데 한 사람이 도망가면 나머지 이십구 명은 죽어나는 거였다.

한 명이 도망가면 남아있는 사람이 도망간 사람 이상 고통을 받는다. 더 자유가 없어지고, 말도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딴청은 절대로 못 부린다. 그래도 항상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이나 되니까 말이지 정말 끔찍했다. 개중에 일본사람이라도 한 사람이 참 착했다. 돈을 주고 들어와서 내가 좀 힘들어하는 기색이면 건드리지 않고, 쯔께모노, 김치, 그러고 ‘그것 좀 해 줄 수 없냐?'고 했다. 그러면 배추하고 소금하고 젓갈 그런 것은 없었고, 마늘이나 파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조금씩 가져오면 어린 나이지만 절여서 해 주었다.

주인은 그것도 없는 일 한다고 야단을 했다. 그래서 몰래 절여서 갖다 주면 그 사람이 군인 담요도 주고, 자기 앞으로 나온 치약 칫솔도 더러 주었다. 그래서 세상은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조선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할 게 없나보다. 다들 그 중에 좀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그런 것 같다. 그 사람 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내 이름은 안 잊어버렸다. 내 이름은 요시모토 하나꼬였다. 그곳이 도끼와라는 것만 기억나고 그 외는 하나도 모르겠다.

콩쿨대회

그때는 음성이 너무 고왔다. 만약 이렇게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사람들이 꼭 모여든다고 할 정도로 음성이 좋았었다. 사람들이 나를 추천을 해서 콩쿨대회를 나갔었다. 여러 사람이 추천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데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지금 같으면 노래자랑인 것 같다. 내가 있던 집은 도키와라는 간판이 있는 집이었는데, 이렇게 무슨 간판이 있는 집들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노래 부르기 전에 다들 어느 집에서 왔다고 해서 알았다. 그 전에는 그런 곳에 무슨 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웬만한 이름 있는 영업집은 다 와서 참가한 것 같았다.

도키와에서는 나 혼자만 나갔다. 내가 있던 집이 컸는데도 혼자만 갔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한 삼 사십 명, 사 오십 명 되었나 보다. 일본 노랜데 지금은 첫 머리 조금만 기억이 난다. 하루요 오도메요 오도메요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다. 군대 안인지 밖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부 군복 같은 옷이었다.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니까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몇 십 명 중에서 한 명이 뽑혀 나왔다, 또는 둘이 나왔다고들 말하니까 이 근처에 나 같은 조선여자가 많구나 하고 알았다. 그런 데를 안 나갔으면 몰랐을 것이다.

관보

중국에 있을 때는 집에 편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십사 년도인가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편지가 오고 사망하셨다는 관보가 왔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래도 얘기를 하면 보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주인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대뜸 무슨 소리냐고, 나갔다 언제 온다는 소리냐고 했다. 그래서 이렇다 할 소리도 한마디 못해보고 병신처럼 마냥 울기만 했다. 내세우는 무기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는데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고생했어도 차비만 주면 나오고 싶었다. 돈도 없고, 차비도 안 주고, 가지 못하게 하니까 너무 미웠다. 그렇게 있는데 어떻게 8·15해방이 되었다. 좋은 것도 모르겠고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무의미하고, 너무 허무하고 지난했다.

해방

일이 딱 끝나고 나니까 여기저기 술렁술렁하였다. 8?15 해방됐다고 바로 나가는 게 아니었고, 우리는 바깥에 못 나갔다.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몇 시에 배가 있다’고 했다. 그 배를 타려고 기를 쓰고 나와서 인천에 닿았는데, 육지에 내리지도 못하고 콜레란지 장질부산지 돌림병이 있어서 바다에서 두 주일을 있었다. 배에 갇혔다가 나오니까 주먹밥 같은 밥을 주었고, 삼십 원인지 삼천 원인지 삼백 원인지 모르겠는데 나라에서 돈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를 장충단 공원으로 집결시켰다. 그때는 맘대로 이북도 가려면 갈 수가 있고 이남엘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같이 나온 여자들 셋이랑 ‘우리가 그냥 빈주먹 들고 가면 귀여움 받겠냐, 그러니까 몇 달 돈을 벌어서 가자’고 해서 간 곳이 천안이었다. 한 삼 개월이라도 벌어서 간다고 셋이서 그랬는데, 몇 개월 안 돼서 이렇게 딱 닫혀버렸다…. 다시는 가고 오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천안에서 돈을 번다고 영업집을 다니면서 노래부르고 술 따라주는 접대부 일을 했다. 그때는 아픔이 있으니까 친구들하고 극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슬픈 영화가 나오면 울며불며 아무 영업집이나 중국집이나 들어가서 빼갈을 먹고선 정신을 못 차렸다. 수채구멍에도 가서 쓰러지고 그러면 친구들이 데려다가 씻겨주고 옷도 갈아 입혀 주었다.

살림

그 다음부턴 계속 색시들 놓고 술 파는 집에 다니면서 한 달에 얼마씩 월급을 받았다. 월급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처음엔 노래만 하는 줄 생각했는데 그러려면 옷도 많아야 하고 화장도 해야 한다는 걸 전혀 생각도 못했다. 월급을 타서 어떻게 조금씩 쓰다 보면 돈이 모이지가 않았다. 그런 데로만 돌아다니다가, 이제 이 생활 안 한다고 온양 신창리에 부인은 죽고 아들 하나에 중풍이 든 어머니가 있는 사람에게 들어갔다. 처음에는 저 사람하고 살면 그래도 주먹깨나 쓰니까 밥은 안 굶기겠지 생각했다. 술집에서 술만 따라 준다고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걸 면하려고 그 사람하고 살면 누가 넘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스물세 살에 6?25가 났는데 그때가 6?25 전이니까 한 스물하나, 둘 쯤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나가면 열흘도 좋고 한 달도 좋았다.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여자도 데리고 오고 빚도 지고 오고 갖은 짓을 다했다. 나는 어떻게 살 길이 없으니까 나무도 주워와서 때고 벼 찧는 방앗간에 가서 쓰레기 주워서 때는데도 사흘을 밥을 못 끓이게 되었다. 중풍이 들은 시어머니가 누룩을 어떻게 하라던가, 술밥을 찌는 법 등을 안에서 말로 가르쳐 주어서 쌀 한 말로 술을 한번 빚어 보았다.

콩나물에 아무 양념도 없이 끓여서 술과 팔았는데 사람들이 잘 먹고 돈도 잘 벌렸다. 오륙년 쯤 지냈는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살아도 할 수 없어서 도망을 나왔다. 또 그런 술집 밖에는 갈 데가 없었다. 술집에 가 있는데 그 사람이 무척 찾아 다녔다.

자궁수술

자꾸 배는 나오면서 냉은 냉대로 터져 나오고 그래서 산부인과를 몇 번 가서 진찰을 하니까 혹 같다고 했는데도 그냥 지냈다. 나중에 기독병원에 가니까 더 있어선 안 된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요꼬네 수술을 하면서 나팔관을 막아놓아서 양쪽에 혹이 되었다. 아랫배 양쪽에 주먹만한 혹이 달려서 떼어내야만 했다. 스물여덟 살 쯤에 인천 기독병원에서 양쪽에 혹을 다 떼어냈다. 내 명이 어찌나 긴지 잔인하게 질기다. 얼마나 추울 때 수술을 했는지 수술을 받고 나서 꽝꽝 얼은 링거 주사를 그냥 갖다 꽂았다.

그러니까 조금도 안 들어가서 온 몸이 새까맣게 죽다시피하고 막 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담당의사가 들어와서 난 수술 실수 없이 잘 했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지라고 야단하고 나갔다. 링거 주사를 빼고 사시나무 떨 듯 하는데도 죽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사를 한 대 못 맞아 보고 그냥 일주일 만인가 아흐레만에 퇴원을 했다. 퇴원을 해서는 왜 새벽 한 네시쯤이면 그렇게 배가 고픈지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내가 세를 들어 살면서 수술을 해서 주인집에 우는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해야겠는데 참아지질 않았다.

주인집에서 열심히 간호하느라고 해주는데 새벽에 우는 소리가 들리면 속상할까봐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면 배고픈 게 가셔지고…. 참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동거

그 다음엔 오류동, 포천에 있는 영업집으로 다니면서 목구멍 팔아먹고 살았다. 그때는 몸을 파는 게 아니라 목구멍을 팔아서 살았다. 그러다가 포천에서 내가 벌어서 사는데 죄가 되진 않겠지 하고 삼남 일녀 있는 남자한테 얹혀서 살았다. 내가 덕을 못 타고난 건지 그 사람도 부인을 두고도 모자라서 나한테 돈을 뜯어가 기집질을 하였다. 전기회사에 다녔는데 그때는 월급이 얼마 없었다. 사남매 공부 가리켜야지 여섯 식구가 밥을 먹고 살아야지 줄 게 없었다. 또 나는 살림욕이 강했다.

돈 달라고 해도 안 주면 건넌방에 가서 가스불을 피워 놓고 죽는다고 하고, 나 죽으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애들이 가만 둘 줄 아느냐고 위협을 했다. 아휴- 말을 할 수가 없다. 거기서 겪은 것만 해도 기가 막힌다. 지금 사람들이 자식을 안 난다고 하면 한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식이 필요하고 동기간과 부모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일가친척이 없으면, 울타리가 없으면 아무리 힘을 써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친구는 아무리 있어도 친구는 친구지 일가 친척이 아니니까 말발이 서지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아이를 키우면 그 사람이 다시는 안 오려니 생각하고 아이를 갖다 키우게 되었다.

아들과의 만남

내가 서른 살쯤 됐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 무슨 불상사가 나거나 동네 초상이 나도 내 손을 거쳤다. 그렇게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어느 날 친구가 ‘지금 삼청병원에서 오고 갈 데 없는 사람이 애기를 낳아 가지고 삼(탯줄)을 의사가 안 갈라 준대. 저기 가서 삼 갈라줘야지 어떡하냐’고 했다. 그래서 삼 갈라주려고 담요를 가지고 가니까 엄마는 딱 벽을 바라보고 드러누워 있었다. 밥을 먹으라니까 국은 하나도 안 먹고 간장을 꾹꾹 찍어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애를 다른 데다 줄 거다, 내다 버릴 거라고 사람들이 알았다.

친구들이 와서 이번에 애를 갖다 안 기르면 생전 이 집 귀신 노릇 하려고 그러냐면서 쟤만 갖다 기르면 절대로 동거하는 남자가 안 올 거라고 했다. 갖다 기르면 안 온다니까 그것도 솔깃하기도 해서 데리고 왔다. 나한테는 양말 한 짝을 안 사도 그 아이한테는 총도 사주고 유모차도 사 주면서 키웠다. 호적에 올려야겠기에 그 집에다 올려줬다. 황씨 집이어서 황○○라고 했다. 집을 팔아서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만 데리고 부천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살림욕이 강해서 돈놀이, 일수놀이, 딸라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 쪽에 준 돈이 들어와서 이제 몇 일 날은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쪽에 몰려서 몰린 돈 받아야지 하다가 어영부영 부천에서 세월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 도망도 못 가고 내내 그냥 저냥 살다가 빚 보증을 잘못 서서 홀랑 빚을 지게 되니까, 황씨가 더 뜯어먹을 거 없다 싶었는지 왕창 먹으려고 살던 집을 팔았다. 그러나 내가 집문서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도금을 못 받고 계약금만 받았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냥 황씨 조금 주고 좋게 해결하라고 했다.

어디에 간들 지금까지 찾아 다녔는데 그냥 두겠냐면서 집 팔았다는 소리 들으면 더욱 그냥 안 둘 테니 돈 조금 주고 너는 빌어먹어도 아는 사람한테 빌어먹으라고 하면서 붙잡았다. 그래서 집을 팔았는데, 아마 첩으로 살다가 남자한테 위자료 주고 나왔다는 사람은 한국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다. 빚을 다 갚고 나니까 빈주먹이어서 그때부터 노점에 앉아서 심지어 번데기 장사까지 했다. 옥수수도 삶아서 팔고, 계란도 삶아서 팔았다. 나는 못 배웠지만 남의 자식 데려다가 안 가르치면 안 된다 싶어서 안 해본 것 없이 별 짓을 다 해서 가르쳤다.

단 돈 만 원을 들고 옷 한 벌을 못 사 입고 친구들이 입던 것이나 주는 것을 그냥 얻어 입고 살았다. 그래도 하나님이 축복을 해 줘서 그렇게 저렇게 살아갔다. 아들을 신학대학 졸업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냈다. 지금은 목회 하러 다닌다. 공납금을 해 놓고 나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른다. 나 혼자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같이 이런 무식쟁이한테 아들을 주고, 그로 인해 이렇게 대학교도 보내다니 웬 복입니까 하면서 지내던 생각이 엊그저께 같다.

들통

위안부 보상문제에 대해 돈을 적게 주네 마네 해서 말썽이 되었을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며느리랑 같이 보다가 내가 ‘정작 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쉬쉬하고 부끄러워하고 고개도 못 드는데, 엉뚱한 사람은 저런다’고 했더니 그 말을 잡아서 어머님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다. 많이 울었다. 아들은 그렇게 고생해서 오늘까지 사신 게 기적이라며 참 많이 울었다. 전에는 아무리 키워서 잘 해줘도 나한테 별로 잘 하려고 안 했는데 알고 나서는 방도 치워주고, 설거지도 목사가 한다. 지금 사는 곳 복지관에서도 자원봉사자를 보내준다고 했지만, 아직은 그래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데 남을 괴롭히는 것 같아 거절했다.

바람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벌이 와서 딱 쏘는 것처럼 욱신욱신거리며 깜짝 놀라곤 한다. 다리도 그렇고 발도 그렇다. 어떤 때는 머리도 띵하고 이글이글하다. 얼마나 많이 아픈지 말도 못한다. 그래도 아무도 환자로 보지 않는다. 의사만 알아보고서 조심하라고 한다. 의사 말로는 안 좋은 건 다 가지고 있단다. 콜레스테롤, 당도 삼백 가깝고, 골다공증도 있다. 골다공증은 어려서 위안소에 있을 때 자궁 전체를 들어냈기 때문이다. 지금 여자에게 있어야 할 자궁이 벌써 삼십 안 돼서 들어내고 배에 큰 수술만 세 번이나 했다.

담석, 창자유착, 쓸개정체, 쓸개를 다 들어냈다. 이것은 사십 중반에 했다. 이렇게 하나도 성한 데가 없는데 남 보기에 병자 같지 않으니 이것도 은혜다. 예전엔 철이 없어서 우리집이 너무 가난하다던가, 나라가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가 없이 살아서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어느 부모가 그런데다 자식을 팔아먹겠는가. 그때는 철이 없고 모르니까 부잣집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니 지금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예전에도 일본에 동의해서 오고가지 못할 데다 끌어다 놓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절대로 있어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이제 남은 생이 얼마 없으니 그동안이라도 한이 풀어지기를, 한마디라도 진실한 사과의 말을 듣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저렇게 죽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저 만분지 일 천분지 일이라도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사과하고, 우리들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마음을 푸십시오 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하나의 바램은 정대협에서 이렇게 힘써서 일하는데 우리 민족이 힘을 써서 기념관을 빨리 세워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자식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식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남겨 놓고 죽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름도 성도 없이 엄청난 고생만 하고 그냥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념관을 세워주면 그래도 부끄러운 이름이라도 이름이 남지 않겠는가.

우리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 사람들 마음을 감동시켜서 빨리 기념관이 세워지고 이름이라도 남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가 친척이 있나 자식이 있나 이름을 남길 길이 없다. 이 세상에 나 하나다.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내 성을 그냥 짊어지고 가기가 그야말로 너무 서운하다. 기념관이나마 세워서 이름을 남겨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