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옥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1928~현재)

“죽을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길원옥 할머니는 1928년 10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난 뒤 평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13세(1940년)였던 겨울, 아버지가 도둑의 물건을 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그 벌금을 벌기 위해 중국 만주 하얼빈으로 갔으나 그곳은 일터가 아닌, 위안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간 있다가 병을 얻어 귀국했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돕다가 돈을 벌기 위해 15세 때(1942년) 중국 석가장으로 건너갔지만, 또다시 ‘위안부’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8세 때(1945년) 해방이 되어 인천으로 귀국한 뒤 함께 온 여자들과 돈을 벌어 집에 가고자 했으나 삼팔선에 막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이 쉽지만은 않았고 만물상, 노점상 등을 하며 생계유지를 하였습니다.

할머니가 31세가 되던 때에 양아들을 들여 키웠고 시장에서 장사하며 돈을 모았으나 빚보증을 잘못하여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아들은 목사가 되었고, 1998년 정부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하였습니다. 인천에서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2004년부터 정대협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피해자 등록 후, 국내외 많은 곳을 다니며 증언 활동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알리고 있으며 매주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김복동 할머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세계 전쟁피해 여성을 돕는 데 쓰겠다며 ‘나비기금’을 제정하셨고 뒤이어 2017년 5월 17일,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여성 평화·통일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길원옥여성평화상을 제정하여 후배 여성 활동가들을 양성 및 지원하고 계십니다.

길원옥 할머니 말씀

“하여튼 뭐, 자유가 없으니까. 낮에두 그 사람들이 들어 닥치면은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그 사람들- 그냥 받아야 했지. 이제 시방으로 치면 홀 마냥 이렇게 해 가지구 갓(가장자리)으로 삥- 둘러 이렇게 의자가 있는데 거기에 앉아 있은 생각이 나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너무나 험하게 살았어요. 그 괴로운 생각, 가슴 아픈 생각을 일일이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오늘날까지 살지도 못했어요.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질 못했을 거에요.”

“2000년에 TV를 보고 있었어요. 우연히 위안부 피해자가 울면서 증언하고 일본을 욕하는 장면을 보았죠. 나도 모르게 ‘정작 다니면서 떠들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왜 저렇게 난장판을 벌이느냐’라고 혼잣말을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피해를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얼굴에 침 뱉느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옆에 앉았던 며느리가 그 소리를 들었나봐요. 며느리는 우리네들과 달리 깨어 있잖아요.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 수상하다’고 하더니 그 뒤로부터 정대협으로 통일부로 적십자로 다니면서 절차를 알아가지고 오고 알려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피해자라는 게 알려졌죠. 할 수 없이 하루 수요시위를 하는 데 나가보니까 ‘아 이건 아니로구나,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일본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들을 위해서 젊은이들이 저렇게 싸우는데 당사자가 숨어서 살 필요가 뭐 있나. 내가 같이 나가 싸워야지.’ 그래서 나온 게 2002년인가 그래요. 한 가지라도 숨기지 않고 처음에 당한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죠. 외국에도 다닌 것이 싸움 없는 나라가 돼야 우리같이 피해를 보는 사람이 다시는 안 생기겠다 싶어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학교에서 오라면 학교에 가고, 다른 데서 오라면 또 다녀요. 부끄러운 얼굴인데도 부끄럽다는 내색 없이 다닙니다. 지금은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란 걸 아니까요.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일본 정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있는 그대로 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죠. 이걸 가둬놓고, 숨기고, 세상 사람이 알아볼까 감출 때에는 참 힘들었죠. 같이 사는 아들도 내가 그렇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으니까요.”

“얼마나 아팠으면 추우나 더우나 어디든지 쫓아다니겠어요. 싸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아파도 다닙니다. 죽을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진실이나 밝혀주길  일본정부가 양심이 있다면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