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차 정기 수요시위 주관은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 하였고 사회는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한 하상바오로 수녀님이 보았습니다.
먼저 여는 노래로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수녀님들의 <꽃> 노래공연이 있었습니다. <꽃>은 영화 <김복동>의 주제곡입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한쪽에서는 수녀님들이 할머니들의 사진을 들고 계셨습니다.
이어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박 마리안또니오 수녀님의 주관단체 인사말 후,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의 주간보고가 있었습니다.
연대발언이 이어졌습니다. 횡성 현천고등학교 이윤슬, 조수아 학생과, 학생 때 수요시위에 참가했고 선생님이 되어 또다시 참가하신 최희원 선생님, 예수회 김정대 신부님, 시민운동가 다나카 노부유키 님이 힘찬 연대발언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다나카 노부유키 선생님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전시 중인 일본군의 일기를 쓴 장본인의 아드님이시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문화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신일미나 수녀님, 정히야친타 수녀님, 우스바니야수녀님, 주플로린 수녀님이 <홀로아리랑>을 합창해 주셨고, 오 피에르 수녀님이 힘있고 신명나는 목소리로 <8호 감방의 노래>, <쾌지나 칭칭나네> 노래를 불러 주셨습니다. 장구는 하애정 님이 쳐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조 알벨도 수녀님, 김 석문가롤로 수녀님이 성명서 낭독을 하고 닫는 노래로 <바위처럼> 공연을 하며 1667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주관단체인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외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현천고등학교,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일본 황보강자, 모치즈키, 다나카 노부유키, 하라 요사카즈, 김형년, 김복동의 희망, 배성희, 최은민, 자립지지공동체, 여성교회, 난민안전지대,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온라인 댓글로는 Sung Park(시애틀늘푸른연대), 이원석, 조안구달,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lee파도저편, 쟌마리, 전은하수, 임계재, 은지, 김클라우디아 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수어 통역은 현서영 님이,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제1667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주간보고
지난 주 또 경악할만한 사건이 대학에서 발생했습니다. 한신대학교의 윤 모 교수가 학부 수업시간에 “위안부가 강제징용 됐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팔려갔다는 게 자기네 아버지나 삼촌이 다 팔아 처먹은 거다”고 발언했습니다. “위안부는 대부분 2년 계약제”였다며 돈을 벌어서 돌아왔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불가피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사과를 35번이나 했는데 안 한다”고도 했습니다. 취재기자의 질문에는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며 <반일종족주의> 책에 다 근거가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고 합니다.
경악할만한 일입니다.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 그것도 누구보다 엄밀한 사회적·역사적 진실을 가르쳐야 할 ‘사회조사방법’ 수업에서 교수가 역사부정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니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일본군성노예제와 강제동원의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일본군의 문서에서, 일본군인의 회고록에서, 무엇보다 전 세계 피해당사자들의 일관되고 고통스러운 증언에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과 협박, 납치, 인신매매는 물론,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설치, 동원, 이송, 감금 사실이 낱낱이 드러난 지 30여년이 넘었습니다. 수많은 유엔권고안과 보고서, 각국 의회 결의안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사법부와 일본의 법정에서도 그 불법성이 확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 교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기한 <반일종족주의>를 들먹이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행사하고 역사부정론을 강단에서 펼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이 35번이나 사과했다니요. 일본은 일본 정부와 군이 주도한 조직적인 범죄사실을 인정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불가역적인 사죄를 한 적이 없으며. 불법성에 대한 법적 배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입으로는 애매모호한 유감을 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 합법강점과 동원의 합법성, 피해자들의 ‘자발성’을 강조해 왔을 뿐입니다. 유력정치인들과 총리가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운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며 독도 영유권도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소녀상 철거와 설치 방해를 위해 총리부터 공관원까지 총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하자, ‘국제법 위반’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배상책임을 부정하며 한국을 비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식적인 내용조차 모르는 윤 교수는 도대체 무슨 책으로 식민지 시기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부해 왔단 말입니까. 한때 ‘진보연’했지만 사실은 아스팔트 친일극우론자들이나 ‘왜라이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참담한 역사퇴행의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굳건히 지키고 계승하는 일,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는 일, 우리들의 기억이 기록으로 남아 후대가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습니다. 윤 모 교수 같은 자들이 공공연히 일본군성노예제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폄훼하는 일이 없도록, 평화의소녀상이 훼손당하거나 모욕당하는 일이 없도록 법으로 못 박기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의 근본과 역사정의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자들에게 경고와 압박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기도 합니다. 정부 여당이 방해하고 있는 법안 통과를 위해 곧 국민청원도 시작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9월 28일,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 압력으로 독일 베를린 평화의소녀상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정의기억연대가 진행하고 있는 철거 대응 캠페인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정의기억연대는 역사적 진실이 기억되고 기록되는 걸 두려워하는 전범 국가 일본, 이에 맞장구치며 피해자 인권과 역사를 팔아먹는 자들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2024년 9월 25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연대발언_예수회 김정대 신부
만행을 저지른 국가와 그 피해자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며
우리의 몸은 개인의 몸 이전에 ‘사회적 몸’입니다. 우리의 몸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뒷받침해주는 사회 구조, 문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적인 사회 환경은 잘못된 ‘사회적 몸’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사회적 몸’이 사람들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자율을 검열해서 그들을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게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사회적 몸’은 할머니들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고, 할머니들도 ‘매춘녀’라는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이면서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남들에게 알리지도 못하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피해와 그로 인한 고통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사회적 몸’이 그들 내면의 욕구를 검열했던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삶의 시간은 1940-1945년 사이에 멈췄습니다. 할머니들은 현재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과거의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선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기 위해 연대했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바라며 수요집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국가적으로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를 규탄하며, 이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서 가해자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올바른 해결이란 미래에 다시는 이런 일이 벌이지지 않도록 두 나라 사이의 어떤 형식의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두 나라 정부도 제3자가 아닌 당사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화해의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의 몸과 마음의 생긴 과거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 화해의 과정을 통해서 할머니들과 이 사회의 미래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몸’에 갇힌 사람들은 할머니들을 일본 군인들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며 자신들도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어 사회, 정치적으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고, 이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두 나라 정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이 아닙니다. 이는 국가가 저지른 폭력입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정의의 관점에서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화해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함께 세계 평화에 기여하며 공존하는 길입니다. 이런 정의에 기반을 둔 화해의 과정이 없이는 할머니들과 같은 피해자들은 언제든 다시 생기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서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우선 요구합니다.
연대발언_다나카 노부유키 시민운동가
저는 일본에서 온 다나카 노부유키라고 합니다. 만 73세입니다. 일본 규슈(九州)지방 한가운데에 위치한 구마모토(熊本)시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인 무토 아키이치(武藤秋一)는 전쟁 당시 구마모토 제6사단 보병 13연대에 소속한 병사로서,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중국침략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 기간에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당시의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南京)을 공격했습니다. 아버지가 소속했던 제6사단은 난징에서 수많은 시민과 무저항 병사들을 학살했습니다.
그후 제6사단은 양쯔강 상류의 우푸(蕪湖)시에서 4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이 무렵 일본군은 중국 각지에 '위안소'를 만들어,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여성들을 '성노예'로 모았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에 따르면, 1938년 2월 21일과 3월 12일에 '위안소'에 간 사실이 있고, 그때마다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위안부'들을 강간했습니다.
저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선생님의 논문을 통해, 우푸에 있던 위안소의 명칭과 경영자, 당시의 주소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주소를 단서로,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하여 우푸의 해당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옛 위안소 자리는 현재 서민 동네의 ‘공안(公安)시장’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마 1938년경에도 시장이었던 듯하고, 이를 일본군이 급히 개조해서 '위안소'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 자신에게 아버지가 전쟁 당시 자행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낸다는 것이 결코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부가 “종군위안부”와 “강제연행”이라는 단어를 교과서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움직임이 다시 거세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정부는 세계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각국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운 정부의 움직임대로라면, 머지않아 일본의 어린이나 젊은이가 ‘위안부 문제’를 알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도 아버지의 일기에 쓰여 있는 사실을 밝혀 나감으로써, 일본 국내에서 ‘위안부’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계속 알려 나가겠습니다.
1667차 정기 수요시위 주관은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 하였고 사회는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한 하상바오로 수녀님이 보았습니다.
먼저 여는 노래로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수녀님들의 <꽃> 노래공연이 있었습니다. <꽃>은 영화 <김복동>의 주제곡입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한쪽에서는 수녀님들이 할머니들의 사진을 들고 계셨습니다.
이어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박 마리안또니오 수녀님의 주관단체 인사말 후,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의 주간보고가 있었습니다.
연대발언이 이어졌습니다. 횡성 현천고등학교 이윤슬, 조수아 학생과, 학생 때 수요시위에 참가했고 선생님이 되어 또다시 참가하신 최희원 선생님, 예수회 김정대 신부님, 시민운동가 다나카 노부유키 님이 힘찬 연대발언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다나카 노부유키 선생님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전시 중인 일본군의 일기를 쓴 장본인의 아드님이시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문화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신일미나 수녀님, 정히야친타 수녀님, 우스바니야수녀님, 주플로린 수녀님이 <홀로아리랑>을 합창해 주셨고, 오 피에르 수녀님이 힘있고 신명나는 목소리로 <8호 감방의 노래>, <쾌지나 칭칭나네> 노래를 불러 주셨습니다. 장구는 하애정 님이 쳐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조 알벨도 수녀님, 김 석문가롤로 수녀님이 성명서 낭독을 하고 닫는 노래로 <바위처럼> 공연을 하며 1667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주관단체인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외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현천고등학교,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일본 황보강자, 모치즈키, 다나카 노부유키, 하라 요사카즈, 김형년, 김복동의 희망, 배성희, 최은민, 자립지지공동체, 여성교회, 난민안전지대,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온라인 댓글로는 Sung Park(시애틀늘푸른연대), 이원석, 조안구달,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lee파도저편, 쟌마리, 전은하수, 임계재, 은지, 김클라우디아 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수어 통역은 현서영 님이,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제1667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주간보고
지난 주 또 경악할만한 사건이 대학에서 발생했습니다. 한신대학교의 윤 모 교수가 학부 수업시간에 “위안부가 강제징용 됐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팔려갔다는 게 자기네 아버지나 삼촌이 다 팔아 처먹은 거다”고 발언했습니다. “위안부는 대부분 2년 계약제”였다며 돈을 벌어서 돌아왔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불가피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사과를 35번이나 했는데 안 한다”고도 했습니다. 취재기자의 질문에는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며 <반일종족주의> 책에 다 근거가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고 합니다.
경악할만한 일입니다.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 그것도 누구보다 엄밀한 사회적·역사적 진실을 가르쳐야 할 ‘사회조사방법’ 수업에서 교수가 역사부정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니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일본군성노예제와 강제동원의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일본군의 문서에서, 일본군인의 회고록에서, 무엇보다 전 세계 피해당사자들의 일관되고 고통스러운 증언에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과 협박, 납치, 인신매매는 물론,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설치, 동원, 이송, 감금 사실이 낱낱이 드러난 지 30여년이 넘었습니다. 수많은 유엔권고안과 보고서, 각국 의회 결의안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사법부와 일본의 법정에서도 그 불법성이 확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 교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기한 <반일종족주의>를 들먹이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행사하고 역사부정론을 강단에서 펼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이 35번이나 사과했다니요. 일본은 일본 정부와 군이 주도한 조직적인 범죄사실을 인정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불가역적인 사죄를 한 적이 없으며. 불법성에 대한 법적 배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입으로는 애매모호한 유감을 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 합법강점과 동원의 합법성, 피해자들의 ‘자발성’을 강조해 왔을 뿐입니다. 유력정치인들과 총리가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운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며 독도 영유권도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소녀상 철거와 설치 방해를 위해 총리부터 공관원까지 총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하자, ‘국제법 위반’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배상책임을 부정하며 한국을 비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식적인 내용조차 모르는 윤 교수는 도대체 무슨 책으로 식민지 시기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부해 왔단 말입니까. 한때 ‘진보연’했지만 사실은 아스팔트 친일극우론자들이나 ‘왜라이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참담한 역사퇴행의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굳건히 지키고 계승하는 일,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는 일, 우리들의 기억이 기록으로 남아 후대가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습니다. 윤 모 교수 같은 자들이 공공연히 일본군성노예제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폄훼하는 일이 없도록, 평화의소녀상이 훼손당하거나 모욕당하는 일이 없도록 법으로 못 박기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의 근본과 역사정의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자들에게 경고와 압박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기도 합니다. 정부 여당이 방해하고 있는 법안 통과를 위해 곧 국민청원도 시작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9월 28일,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 압력으로 독일 베를린 평화의소녀상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정의기억연대가 진행하고 있는 철거 대응 캠페인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정의기억연대는 역사적 진실이 기억되고 기록되는 걸 두려워하는 전범 국가 일본, 이에 맞장구치며 피해자 인권과 역사를 팔아먹는 자들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2024년 9월 25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연대발언_예수회 김정대 신부
만행을 저지른 국가와 그 피해자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며
우리의 몸은 개인의 몸 이전에 ‘사회적 몸’입니다. 우리의 몸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뒷받침해주는 사회 구조, 문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적인 사회 환경은 잘못된 ‘사회적 몸’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사회적 몸’이 사람들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자율을 검열해서 그들을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게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사회적 몸’은 할머니들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고, 할머니들도 ‘매춘녀’라는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이면서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남들에게 알리지도 못하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피해와 그로 인한 고통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사회적 몸’이 그들 내면의 욕구를 검열했던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삶의 시간은 1940-1945년 사이에 멈췄습니다. 할머니들은 현재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과거의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선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기 위해 연대했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바라며 수요집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국가적으로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를 규탄하며, 이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서 가해자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올바른 해결이란 미래에 다시는 이런 일이 벌이지지 않도록 두 나라 사이의 어떤 형식의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두 나라 정부도 제3자가 아닌 당사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화해의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의 몸과 마음의 생긴 과거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 화해의 과정을 통해서 할머니들과 이 사회의 미래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몸’에 갇힌 사람들은 할머니들을 일본 군인들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며 자신들도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어 사회, 정치적으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고, 이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두 나라 정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이 아닙니다. 이는 국가가 저지른 폭력입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정의의 관점에서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화해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함께 세계 평화에 기여하며 공존하는 길입니다. 이런 정의에 기반을 둔 화해의 과정이 없이는 할머니들과 같은 피해자들은 언제든 다시 생기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서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우선 요구합니다.
연대발언_다나카 노부유키 시민운동가
저는 일본에서 온 다나카 노부유키라고 합니다. 만 73세입니다. 일본 규슈(九州)지방 한가운데에 위치한 구마모토(熊本)시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인 무토 아키이치(武藤秋一)는 전쟁 당시 구마모토 제6사단 보병 13연대에 소속한 병사로서,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중국침략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 기간에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당시의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南京)을 공격했습니다. 아버지가 소속했던 제6사단은 난징에서 수많은 시민과 무저항 병사들을 학살했습니다.
그후 제6사단은 양쯔강 상류의 우푸(蕪湖)시에서 4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이 무렵 일본군은 중국 각지에 '위안소'를 만들어,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여성들을 '성노예'로 모았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에 따르면, 1938년 2월 21일과 3월 12일에 '위안소'에 간 사실이 있고, 그때마다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위안부'들을 강간했습니다.
저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선생님의 논문을 통해, 우푸에 있던 위안소의 명칭과 경영자, 당시의 주소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주소를 단서로,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하여 우푸의 해당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옛 위안소 자리는 현재 서민 동네의 ‘공안(公安)시장’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마 1938년경에도 시장이었던 듯하고, 이를 일본군이 급히 개조해서 '위안소'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 자신에게 아버지가 전쟁 당시 자행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낸다는 것이 결코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부가 “종군위안부”와 “강제연행”이라는 단어를 교과서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움직임이 다시 거세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정부는 세계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각국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운 정부의 움직임대로라면, 머지않아 일본의 어린이나 젊은이가 ‘위안부 문제’를 알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도 아버지의 일기에 쓰여 있는 사실을 밝혀 나감으로써, 일본 국내에서 ‘위안부’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계속 알려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