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저 하늘 멀리
보내 드린 지난 3월 2일은 대구가 코로나의 공포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길에 더욱 크고 매서운 봄바람이 부는 날이었죠.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달려가보니 병원은 이미 확진자의 방문으로 거의 모든 병동이 문을 닫고, 할머니를 늘 가까이서 지켜봐
주시던 원장선생님도 자가격리 중이셨습니다. 단지 할머니가 계셨던 중환자실이 있는 층만 불이 켜져 있고, 목숨을 걸다시피 환자를 돌본 요양보호사가 방호복이 없어서 입었다는 비옷을 유품이라며 저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희들은 그러면서 지난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응원속에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가신 서봉임 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지역 할머니들께선 왜 이리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간속에 그리 억울한 생의 마지막이 되었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할머니를 마지막 병상에서
뵈었던 몇 주 전만해도 이제는 종아리가 부풀고 온몸에는 더 이상 수액을 놓을 자리조차 없어서 다리의 작은 바늘 구멍으로 통하게 했고, 그 다리마저 부풀어오르는 부기를 견디지 못하실 정도였죠. 하루에
영양식 깡통 몇 개도 소화를 못하시고, 입맛은 없어서 보기에도 꺼칠한 혀를 왔다갔다하시면서도 의식이
있는 순간은 방문한 손님 대접을 잊지 않으시던 따뜻한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할매!
저는 중국까지 끌려가서
겪으신 가슴 아픈 이야기에 놀랐지만 그 이후에 할머니가 걸어오신 인생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할머니의
희생정신과 놀라운 사랑으로 맺은 커다란 결실과 희생의 결과는 몇몇 사람만 알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당신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다른 사람에 누가 끼치는 것은 아닌지 배려하신 감춰두신 아름다운 이야기는 저희가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저가 나눌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비춰보지만 저가 할머니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부족함을 느끼고 합니다. 할머니는 고통스런 과거 이야기를 잊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가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도 저가 있는 사무실에서
전시실을 지나가면 여러 할머니가 증언하시는 영상 가운데 할머니의 증언이 가장 또렷하게 메아리 져서 저의 귓가에 머뭅니다. 누구보다 또렷한 목소리를 가지시고 힘차게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며 안타까움과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시며 사랑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아름답습니다. 누구보다 안타까움이 많은 사연을 감추시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할머니의 증언은 누구보다 또렷하고
가슴에 큰 감동을 줍니다.
할머니를 이렇게 보내 드린
2020년도 가고 할머니의 동료도 올해 두분 더 그곳으로 가셨죠. 할머니
마지막 부탁을 드리자면 앞으로 내년 1월에 있는 중요한 재판에서는 할머니가 이때까지 아끼신 말을 꼭
저희를 통해서 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할머니께서
아끼신 안타까운 이야기가 제발 많은 사람의 가슴에 통해서 울려 이때까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외면하려 했던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할머니의 안타까운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고 올바른 역사의 해결이 되는 전환점이 되도록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과 할머니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 생에서 더욱
편히 쉬시고 할머니의 따뜻함을 나눠 주시며 행복한 영생을 하시길 오늘 이렇게 2020년 마지막 수요시위를
통해서 기원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의 시계가 멈춘 것 같았던 2020년 할머니의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갔습니다. 증언 당시에도 적지 않은 나이였던 할머니는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분이 돌아가셨고 남은 분들도 고령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4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존자는 16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한지 30년이 흘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이후 등장한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 증언 활동에 나서기도 하고 일본의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에도 일본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할머니의 증언조차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할머니는 30년 동안 일본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할머니의 아픔에 공감하였고 이런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3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사실 이 문제는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정부가 사죄와 배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기억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려야 합니다. 현재 살아계신 할머니는 16명으로 2021년에는 몇 분이나 살아계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할머니가 없는 미래에도 우리는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남다른 아픔을 겪었던 할머니는 해방 후 그 아픔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둔 채 살아오셨습니다. 마음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에도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증언 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시선 속에서 남은 일생을 살아온 할머니가 다음 생에는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가족, 나 그 자체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다음 생에는 슬프고 화나는 일보다 즐겁고 행복한 일로 일생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로 혼란스러운 일상의 연속이다. 떠난 사람을 제대로 배웅하지도 못하고 또 온전히 슬퍼하지도 못하는 그런 일상이 되었다. 막달할머니의 부고를 문자로 받자마자 마음이 무거웠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끼리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다는 소식에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다. 이렇게나마 한 자 한 자 할머니를 기억하며 늦은 인사를 드린다.
지난 9월 25일, 막달할머니 49제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담담하게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었지만 사진 속의 할머니를 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익숙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며 할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막달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즈음 이었다. 부산에서 영상활동을 시작하면서 할머니들을 알게 되었고, 부산시민모임을 통해서 할머니들을 찾아뵈었다. 그때는 활동가들도 지금보다 많았었는데, 해가 갈수록 할머니들은 세상을 떠나셨고, 시민모임의 사람들도 각자의 일상을 보내느라 최근까지 두 명의 활동가가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부산시민모임은 양산에 계셨던 최옥이 할머니를 찾아뵙는 조와, 부산에 계셨던 할머니들을 찾아뵙는 2개의 조로 나누어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할머니들과 안부를 나누었다. 나는 부산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만나 뵙는 조였고 그때 처음 막달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영상 활동을 처음 하는 시기였고, 할머니들을 만나 뵙는 것이 조심스러운 그때였다. 한 달에 한 번 할머니께 인사하는 활동이 반복되는 일상이 되기도 했지만 할머니와의 만남이 이어질수록 마음속에 다짐처럼 들었던 생각은 이 활동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시는 날까지 이 시간만큼은 온전하게 할머니를 위해 보내자고 노력했다. 할머니는 먼저 관계를 맺어왔던 활동가분과 더 많은 소통을 하셨고 나는 주로 할머니의 사진을 찍고, 할머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들이 많았다. 막달할머니는 말씀이 많이 없는 분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할머니의 말투, 할머니가 쓰셨던 단어들, 그 단어들이 어려울 때도 많아서 그게 무슨 뜻이냐 여쭤본 적이 많았다. 할머니와 낮잠을 같이 자기도 하고, 별말 없이 한 시간 가까이 TV만 보다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소소하게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지만 오랜 시간동안의 관계 속에서 많이 가까워 진 것 같지는 않다, 할머니께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물음표가 생기지만 그보다는 내가 할머니를 기억 한다는 것이다. 1시간 넘게 이어지는 49제를 카메라 너머 지켜보면서 할머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막달할머니, 그곳에선 그동안 겪었던 힘든 기억 다 잊으시고 편히 쉬세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전해질지 모르는 인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씩 하던 이 활동도 하지 못한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할머니들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남은 우리의 몫이 더 커지고 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1472차 수요시위 기자회견은 2020년 돌아가신 할머니 추모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최, 주관은 정의기억연대였습니다. 올해는 국내 할머니 네 분과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등 피해 할머니들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먼저 할머니들의 삶을 소개하고 묵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자리인 빈 의자에 헌화를 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평화로에 모이지 못해 정의연 활동가들이 대표로 모두의 마음을 모아 헌화했습니다.
그리고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덕 각 지역 단체에서 추모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서혁수 대표, 일본군위안부역사관(나눔의집) 류은경, 고예지 학예사, 부산시민모임 문창현 활동가,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께서 할머니들과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보내주신 추모사를 정의연 활동가들이 대신 읽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해 주시는 김현석 님, 애월중학교 권현기 님의 추모사도 대독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의 주간보고와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2020년 돌아가신 할머니 추모제 및 147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기자회견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온라인 중계 댓글로 함께해주신 이제리스, John Shin, 알마즈, 장혜영, 공정한사회,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투어이브박미정, Nabi Washington DC(미국 워싱턴), Woohee Kim, 블루몬, 이훈렬, Monica Kim, 현장의소리., Hs K, Moses J Hahn(호주 시드니), 임계재, 렛서팬더, 신동혁空, 이바오로, 정겸심은무죄다, Monica Kim, 안정애, 이원석, Soona Cho(호주 시드니), 임은정_기소청장., 몽살, Chung ja Bang, 류가영, Sung Sohn, Christine Tran, Byung Hee Lee, 신흥진TV, u yeon, 박은덕, Annachoi, Jun Hee Seo, 정수연, 하늘돌고래cali, Sewol Hambi Houston, 해피Kelly, 강선희, 최은영, gratia M, 서울, sy shin, 김토마스기차, 포카 님 고맙습니다.
음향 진행해 주신 휴매니지먼트, 영어 번역 자원활동 해주신 김우희 님 감사합니다. 2020년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연대의 마음을 보내주시고 수요시위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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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서혁수 대표
할머니!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할머니를 저 하늘 멀리 보내 드린 지난 3월 2일은 대구가 코로나의 공포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길에 더욱 크고 매서운 봄바람이 부는 날이었죠.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달려가보니 병원은 이미 확진자의 방문으로 거의 모든 병동이 문을 닫고, 할머니를 늘 가까이서 지켜봐 주시던 원장선생님도 자가격리 중이셨습니다. 단지 할머니가 계셨던 중환자실이 있는 층만 불이 켜져 있고, 목숨을 걸다시피 환자를 돌본 요양보호사가 방호복이 없어서 입었다는 비옷을 유품이라며 저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희들은 그러면서 지난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응원속에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가신 서봉임 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지역 할머니들께선 왜 이리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간속에 그리 억울한 생의 마지막이 되었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할머니를 마지막 병상에서 뵈었던 몇 주 전만해도 이제는 종아리가 부풀고 온몸에는 더 이상 수액을 놓을 자리조차 없어서 다리의 작은 바늘 구멍으로 통하게 했고, 그 다리마저 부풀어오르는 부기를 견디지 못하실 정도였죠. 하루에 영양식 깡통 몇 개도 소화를 못하시고, 입맛은 없어서 보기에도 꺼칠한 혀를 왔다갔다하시면서도 의식이 있는 순간은 방문한 손님 대접을 잊지 않으시던 따뜻한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할매!
저는 중국까지 끌려가서 겪으신 가슴 아픈 이야기에 놀랐지만 그 이후에 할머니가 걸어오신 인생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할머니의 희생정신과 놀라운 사랑으로 맺은 커다란 결실과 희생의 결과는 몇몇 사람만 알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당신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다른 사람에 누가 끼치는 것은 아닌지 배려하신 감춰두신 아름다운 이야기는 저희가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저가 나눌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비춰보지만 저가 할머니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부족함을 느끼고 합니다. 할머니는 고통스런 과거 이야기를 잊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가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도 저가 있는 사무실에서 전시실을 지나가면 여러 할머니가 증언하시는 영상 가운데 할머니의 증언이 가장 또렷하게 메아리 져서 저의 귓가에 머뭅니다. 누구보다 또렷한 목소리를 가지시고 힘차게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며 안타까움과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시며 사랑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아름답습니다. 누구보다 안타까움이 많은 사연을 감추시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할머니의 증언은 누구보다 또렷하고 가슴에 큰 감동을 줍니다.
할머니를 이렇게 보내 드린 2020년도 가고 할머니의 동료도 올해 두분 더 그곳으로 가셨죠. 할머니 마지막 부탁을 드리자면 앞으로 내년 1월에 있는 중요한 재판에서는 할머니가 이때까지 아끼신 말을 꼭 저희를 통해서 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할머니께서 아끼신 안타까운 이야기가 제발 많은 사람의 가슴에 통해서 울려 이때까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외면하려 했던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할머니의 안타까운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고 올바른 역사의 해결이 되는 전환점이 되도록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과 할머니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 생에서 더욱 편히 쉬시고 할머니의 따뜻함을 나눠 주시며 행복한 영생을 하시길 오늘 이렇게 2020년 마지막 수요시위를 통해서 기원합니다.
2020년 12월 30일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서혁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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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나눔의 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 학예사 류은경·고예지 학예사
<추도사>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의 시계가 멈춘 것 같았던 2020년 할머니의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갔습니다. 증언 당시에도 적지 않은 나이였던 할머니는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분이 돌아가셨고 남은 분들도 고령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4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존자는 16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한지 30년이 흘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이후 등장한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 증언 활동에 나서기도 하고 일본의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에도 일본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할머니의 증언조차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할머니는 30년 동안 일본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할머니의 아픔에 공감하였고 이런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3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사실 이 문제는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정부가 사죄와 배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기억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려야 합니다. 현재 살아계신 할머니는 16명으로 2021년에는 몇 분이나 살아계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할머니가 없는 미래에도 우리는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남다른 아픔을 겪었던 할머니는 해방 후 그 아픔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둔 채 살아오셨습니다. 마음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에도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증언 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시선 속에서 남은 일생을 살아온 할머니가 다음 생에는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가족, 나 그 자체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다음 생에는 슬프고 화나는 일보다 즐겁고 행복한 일로 일생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눔의 집·일본군‘위안부’역사관 학예사 류은경·고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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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부산시민모임 문창현
코로나19로 혼란스러운 일상의 연속이다. 떠난 사람을 제대로 배웅하지도 못하고 또 온전히 슬퍼하지도 못하는 그런 일상이 되었다. 막달할머니의 부고를 문자로 받자마자 마음이 무거웠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끼리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다는 소식에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다. 이렇게나마 한 자 한 자 할머니를 기억하며 늦은 인사를 드린다.
지난 9월 25일, 막달할머니 49제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담담하게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었지만 사진 속의 할머니를 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익숙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며 할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막달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즈음 이었다. 부산에서 영상활동을 시작하면서 할머니들을 알게 되었고, 부산시민모임을 통해서 할머니들을 찾아뵈었다. 그때는 활동가들도 지금보다 많았었는데, 해가 갈수록 할머니들은 세상을 떠나셨고, 시민모임의 사람들도 각자의 일상을 보내느라 최근까지 두 명의 활동가가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부산시민모임은 양산에 계셨던 최옥이 할머니를 찾아뵙는 조와, 부산에 계셨던 할머니들을 찾아뵙는 2개의 조로 나누어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할머니들과 안부를 나누었다. 나는 부산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만나 뵙는 조였고 그때 처음 막달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영상 활동을 처음 하는 시기였고, 할머니들을 만나 뵙는 것이 조심스러운 그때였다. 한 달에 한 번 할머니께 인사하는 활동이 반복되는 일상이 되기도 했지만 할머니와의 만남이 이어질수록 마음속에 다짐처럼 들었던 생각은 이 활동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시는 날까지 이 시간만큼은 온전하게 할머니를 위해 보내자고 노력했다. 할머니는 먼저 관계를 맺어왔던 활동가분과 더 많은 소통을 하셨고 나는 주로 할머니의 사진을 찍고, 할머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들이 많았다. 막달할머니는 말씀이 많이 없는 분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할머니의 말투, 할머니가 쓰셨던 단어들, 그 단어들이 어려울 때도 많아서 그게 무슨 뜻이냐 여쭤본 적이 많았다. 할머니와 낮잠을 같이 자기도 하고, 별말 없이 한 시간 가까이 TV만 보다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소소하게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지만 오랜 시간동안의 관계 속에서 많이 가까워 진 것 같지는 않다, 할머니께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물음표가 생기지만 그보다는 내가 할머니를 기억 한다는 것이다. 1시간 넘게 이어지는 49제를 카메라 너머 지켜보면서 할머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막달할머니, 그곳에선 그동안 겪었던 힘든 기억 다 잊으시고 편히 쉬세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전해질지 모르는 인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씩 하던 이 활동도 하지 못한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할머니들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남은 우리의 몫이 더 커지고 있다.
2020년 12월 29일 부산시민모임 문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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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
할머니 추모문
할머니,
늘 쓸쓸했던,
그러나 언제나 고운 미소로 활짝 맞이해 주시던 할머니.
지금은 어느 하늘에서
그 서럽고 아픈 마음 부여잡고 계시는지요
할머니 떠나신 지도 벌써 한 해가 다 되어갑니다.
먼 길 떠나시던 마지막 날,
제대로 배웅도 할 수 없어 더욱 슬피 고였던
제 가슴의 눈물은 아직 그대로이네요.
할머니,
언제나 조용하시던 할머니,
언제나 외롭던 할머니,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고도 반가우셨던 할머니,
무심하게 다정한 말 한마디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할머니.
잡은 손 놓아주기를 그리도 아쉬워하셨던 할머니,
식민지 땅의 딸로 태어나
채 자라기도 전, 불과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되셨던 할머니,
모질고 험한 이 세상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요,
전쟁과 학대와 폭력이 얼마나 끔직했을지요.
내 나라라고 돌아 온 조국에서의 냉대와 멸시는 또 얼마나 서러웠을지요.
어느 단체에서 주고 간 봉투속의 몇 장 지폐를
세고 또 세면서 신기해 하셨다는,
생신에 끼워드린 빨간 루비반지 손가락을
보고 또 보면서 좋아하셨다는
그 이야기는 아직도 슬픈 눈물 속에서만 기억할 수 있지요.
할머니,
부디 하늘에설랑 외롭지 마시고,
기죽지 마시고
쓸쓸하지 마시고
서러움 없는, 원통함 없는
따뜻한 평화의 나라에서
평생 펴지 못했던 그 휘고 아픈다리 곧고 당당하게 펴시고
폭력도 상처도 고통도 없는 안식을
영원히 영원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0년 할머니를 그리며 창원에서 이경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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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김현석
추모사
할머니 그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힘이 없는 나라에 태어나 가녀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으시고
주위의 시선들이 엄청 따가왔을텐데 용기와 신념으로 그 치욕스런 일들을 모두 밝히셨습니다.
할머니가 밝히신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거짓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올바로 쓰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역사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정의를 배우고 민주를 배우며 자랄것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면 안될 것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전쟁없는 그곳에서 부디 영면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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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애월중학교 권현기
용기를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
용기를 내어 피해를 증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할머님들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그 끔찍하고 아픈 역사를 모르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할머님들의 용기 덕분에 저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아픈 역사를 국민이 알고 같이 아파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님들이 내어주신 용기들을 저희가 받아서 언젠가 꼭 일본 정부에 사과를 받아내겠습니다.
이미 저희 곁을 떠나신 할머님들 하늘에서 꼭 지켜봐 주세요.
저희가 꼭 사과받아드릴게요.
지금은 맘이 편치 않으시겠지만 저희가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면 편히 잠들어 주세요. 그리고 다음 생에는 꼭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20년 12월 애월중학교 학생이자 노동당 제주도당 당원 권현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