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어버이날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저희 햇살사회복지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어버이날이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이 함께 지냈습니다. 하동으로 1박2일 즐거운 여행도 하였고 우리 할머니들이 수요시위에 참석해서 발언도 했습니다.
2009년 어버이날, 그날에 방문하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여기 저기 딴 나라로 끌려다니며 왜놈들에게 당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저놈의 나라 군인들한테 당한 것들, 그 행패를 가슴에 꽁꽁 숨기며 숨도 못 쉬듯 살았는데.. 내 잘못인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들 덕분에 깨달았어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여기 계신 아우들도 힘내시오. 숨지 말고 힘내시오. 숨지말고 입내시오. 받아 낼 것은 받아내시오.” 라며 우리 평택 안정리 할머니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평택 안정리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덕분에도 힘을 입기도 하여 국가 상대 소송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변호인단과 활동가들, 연구자들이 함께하여 작년 9월 말에 대법원 승소를 이끌어 냈습니다.
오늘은 158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날입니다.
1992년에 1월에 시작된 수요시위는 만 31년이나 지났습니다. 3년이 아니고 10년, 20년도 아니고 31년!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 해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이 풀릴까요?
고 황금주 할머니는 “진정으로 (일본은) 사죄하고 내 청춘을 돌려놓아라. 사죄하고 내 청춘 돌려놓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해야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를 할까요?
열다섯살인던 1940년, 위안부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고 김복동 할머니게서 1992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하고 1993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초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성노예피해를 증언하셨지요.
고 김복동 할머니는 어느 날 수요시위에 일본 대사관을 쳐다보며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 하루빨리 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대사! 알겠는가 (일본)대사!” 라고 외치셨습니다.
17세에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하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대한민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실을 최초로 증언했었지요.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 “내가 살아 있는 증거다” 라고 말씀하시며 소송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증거인데... 내가 살아있는 증거인데...”
요즈음 우리사회는 316 외교참사여파로 시끄럽습니다. 일본은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노골화시키고 있습니다. 소위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행도 일본에게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소식도 있는데 어찌된 일인가요?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해야 일본군 성노예제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문제해결 그리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될까요?
이곳은 여성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공간입니다. 이제는 국경을 넘어선 세계연대의 장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가 316 외교참사여파로 인한 일본의 역사적 왜곡 및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하여 어떻게 서술할까요?
바라기는 어서 속히 일본군 성노예제문제가 해결되어 수요시위가 사라지는 날이 앞 당겨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연대발언_이도담 두레방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두레방 상담소 활동가 페페입니다.
저는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영화나 전시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부끄럽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만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게된 것은 두레방에서 활동하면서 부터입니다. 저희 두레방 상담소는 의정부 빼뻘마을에 위치해있습니다. 그곳은 과거 기지촌이 있었고 상담소는 미군 위안부인 언니들과 함께 도란도란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는 언니 한분이 저에게 와서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구박해서 사람을 더이상 믿기 힘들다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푸
념을 하셨습니다.
제가 왜 그러냐고, 그래도 두레방에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게 재밌지 않냐고 물어보면 '인생 풋내기가 무얼아냐'고 으름장을 놓으십니다.
그런 언니는 조용히 옆에 가서 팔짱을 끼면 베시시 웃습니다. 사는게 재미없다며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언니의 미간에 주름이 펴지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보입니다. 그리고는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대며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언니는 참 소녀같습니다.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자고 나오면 신이 나듯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멀리 가는 언니를 쫓아서 마을 한바퀴를 돕니다. 그럴때마다 언니는 열심히 마을에 난 풀과 꽃의 이름들을 알려줍니다. 신이 난 언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두레방 활동가로서 저의 꿈은 오늘 하루 한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들이 사는 게 참 고단하지만은 않았다고, 그래도 웃을 날이 있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두레방에서 제가 보고 느낀 언니들은, 역사 속에 있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책이 아닌 오늘 이 자리에 생존해있습니다.
얼마전 한겨례 신문에 올라왔던 95세 박필근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16살에 강제 동원되어 위안소에서 생활했던 할머니를 보고 있으니 우리 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1992년 첫 수요 집회가 시작되었고 벌써 3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일본군 성노예제가 과거에 역사책 귀퉁이에 적혀있는, 머나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나간 역사라고 생각해서 바꿀 수 없다며 두 손
놓고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피해자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소일거리를 하고 무엇을 먹나 고민하는 그들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10분의 생존자가 현재에 그 피해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그들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그날까지 연대하겠습니다.
연대발언_오영미 경기여성연대 상임대표
연대발언_김수민 평화나비 네트워크 숭실대 지부장
안녕하세요! 평화나비 네트워크 숭실대지부 숭실나비 지부장 김수민입니다. 완연한 봄이 찾아왔지만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전해지는 요즘입니다
강제징용 해법안이 나오고 한일정상회담에 후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일본의 교과서에서 다시 역사가 지워지고 있습니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더욱 명확해지고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거나 대폭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강제징용의 '강제'표현이 희석되게끔 표현하는 등 자신들의 전쟁범죄역사를 더욱 부정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여전히 강제징용 해법안에 대해서도 철회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평화나비는 학내에서 학우들의 의견을 모아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고 강제징용해법안을 철회하라는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으고자 합니다. 다음 주에 릴레이 학내 수요시위를 열어 대학생들이 강제징용 해법안을 반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리고 정부가 이를 철회하도록 투쟁할 예정입니다.
지난 15일, 처음 시국선언을 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평화나비 활동만으로도 눈총을 받았던 저희 학교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두려웠습니다. 시국선언 당일까지도 용기가 나지 않아 근심 걱정을 가득 안고 시국선언 장소로 갔습니다. 그때, 함께 시국선언을 진행해줄 친구들을 마주하자, 여태 저를 짓누르던 두려움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 기억으로 다음주 수요일, 학교 캠퍼스 한가운데서 수요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단지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 안과 밖, 내 주변 모든 곳에 함께하는 친구들을 떠올리면 어떤 활동도 망설일 이유가 없어집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긴 투쟁 동안 지치고, 두렵고, 무력한 날이 하루쯤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들에 억눌릴 때면 잠시 잊었던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외롭지 않은 투쟁을 하십시오. 저를 비롯한 대학생 모두도 여러분 곁에 있을 사람들입니다. 오늘 수요시위가 끝난 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떠올리며 온 마음으로 함께합시다! 감사합니다.
158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주관은 기지촌여성인권연대가 하였고, 사회는 김태정 기지촌여성인권연대 활동가님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바위처럼>에 맞춰 평화나비 네트워크 회원과 정의연 활동가가 멋진 율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순덕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대표님의 주관단체 인사말 후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의 주간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어 연대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이도담 두레방 활동가님, 오영미 경기여성연대 상임대표님이 발언해 주셨고, 김수민 평화나비 네트워크 숭실대 지부장님은 부득이 현장에 참석이 어려워 백휘선 평화나비 네트워크 대표님이 대독하였습니다.
참가자, 참가단체 소개 후 안김정애, 김은진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두 공동대표님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1589차 정기 수요시위를 마무리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독일 코리아협의회 이승주 활동가, 기지촌인권연대, 정효숙, 정효진, 정효정,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김덕연, 사) 햇살사회복지회, 김은미, 양담재, 평화나비 네트워크,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김일혜・신모애・공서라・사사키 메구미・마쓰미네 가즈히로(일본 도쿄), 류금숙, 조기훈, 소정, 아르헨티나에서 온 방문객, 자립지지 공동체, 여성교회, 난민안전연구소, 이경화 외 여러 단체와 개인이 참가하였습니다.
온라인 댓글로는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초보초보, 여유와 삶, 이원석, Goo Lee(미국 시애틀), 서유리아, Mike Yun(미국 시애틀), 조안구달, 알마즈, Sung Park, 김공래(뉴질랜드 오클랜드), 얍!신호등이닷, Roy Seungkyu Kim(미국 시애틀 늘푸른연대), 이정신 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수요시위에 현장에서, 온라인으로 함께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인사말_우순덕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상임대표
안녕하세요.
저는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상임대표이자 21년간 평택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사)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입니다.
2009년 어버이날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저희 햇살사회복지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어버이날이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이 함께 지냈습니다. 하동으로 1박2일 즐거운 여행도 하였고 우리 할머니들이 수요시위에 참석해서 발언도 했습니다.
2009년 어버이날, 그날에 방문하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여기 저기 딴 나라로 끌려다니며 왜놈들에게 당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저놈의 나라 군인들한테 당한 것들, 그 행패를 가슴에 꽁꽁 숨기며 숨도 못 쉬듯 살았는데.. 내 잘못인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들 덕분에 깨달았어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여기 계신 아우들도 힘내시오. 숨지 말고 힘내시오. 숨지말고 입내시오. 받아 낼 것은 받아내시오.” 라며 우리 평택 안정리 할머니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평택 안정리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덕분에도 힘을 입기도 하여 국가 상대 소송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변호인단과 활동가들, 연구자들이 함께하여 작년 9월 말에 대법원 승소를 이끌어 냈습니다.
오늘은 158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날입니다.
1992년에 1월에 시작된 수요시위는 만 31년이나 지났습니다. 3년이 아니고 10년, 20년도 아니고 31년!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 해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이 풀릴까요?
고 황금주 할머니는 “진정으로 (일본은) 사죄하고 내 청춘을 돌려놓아라. 사죄하고 내 청춘 돌려놓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해야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를 할까요?
열다섯살인던 1940년, 위안부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고 김복동 할머니게서 1992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하고 1993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초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성노예피해를 증언하셨지요.
고 김복동 할머니는 어느 날 수요시위에 일본 대사관을 쳐다보며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 하루빨리 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대사! 알겠는가 (일본)대사!” 라고 외치셨습니다.
17세에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하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대한민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실을 최초로 증언했었지요.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 “내가 살아 있는 증거다” 라고 말씀하시며 소송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증거인데... 내가 살아있는 증거인데...”
요즈음 우리사회는 316 외교참사여파로 시끄럽습니다. 일본은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노골화시키고 있습니다. 소위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행도 일본에게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소식도 있는데 어찌된 일인가요?
얼마나 수요시위를 더해야 일본군 성노예제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문제해결 그리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될까요?
이곳은 여성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공간입니다. 이제는 국경을 넘어선 세계연대의 장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가 316 외교참사여파로 인한 일본의 역사적 왜곡 및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하여 어떻게 서술할까요?
바라기는 어서 속히 일본군 성노예제문제가 해결되어 수요시위가 사라지는 날이 앞 당겨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연대발언_이도담 두레방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두레방 상담소 활동가 페페입니다.
저는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영화나 전시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부끄럽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만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게된 것은 두레방에서 활동하면서 부터입니다. 저희 두레방 상담소는 의정부 빼뻘마을에 위치해있습니다. 그곳은 과거 기지촌이 있었고 상담소는 미군 위안부인 언니들과 함께 도란도란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는 언니 한분이 저에게 와서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구박해서 사람을 더이상 믿기 힘들다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푸
념을 하셨습니다.
제가 왜 그러냐고, 그래도 두레방에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게 재밌지 않냐고 물어보면 '인생 풋내기가 무얼아냐'고 으름장을 놓으십니다.
그런 언니는 조용히 옆에 가서 팔짱을 끼면 베시시 웃습니다. 사는게 재미없다며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언니의 미간에 주름이 펴지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보입니다. 그리고는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대며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언니는 참 소녀같습니다.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자고 나오면 신이 나듯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멀리 가는 언니를 쫓아서 마을 한바퀴를 돕니다. 그럴때마다 언니는 열심히 마을에 난 풀과 꽃의 이름들을 알려줍니다. 신이 난 언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두레방 활동가로서 저의 꿈은 오늘 하루 한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들이 사는 게 참 고단하지만은 않았다고, 그래도 웃을 날이 있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두레방에서 제가 보고 느낀 언니들은, 역사 속에 있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책이 아닌 오늘 이 자리에 생존해있습니다.
얼마전 한겨례 신문에 올라왔던 95세 박필근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16살에 강제 동원되어 위안소에서 생활했던 할머니를 보고 있으니 우리 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1992년 첫 수요 집회가 시작되었고 벌써 3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일본군 성노예제가 과거에 역사책 귀퉁이에 적혀있는, 머나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나간 역사라고 생각해서 바꿀 수 없다며 두 손
놓고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피해자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소일거리를 하고 무엇을 먹나 고민하는 그들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10분의 생존자가 현재에 그 피해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그들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그날까지 연대하겠습니다.
연대발언_오영미 경기여성연대 상임대표
연대발언_김수민 평화나비 네트워크 숭실대 지부장
안녕하세요! 평화나비 네트워크 숭실대지부 숭실나비 지부장 김수민입니다. 완연한 봄이 찾아왔지만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전해지는 요즘입니다
강제징용 해법안이 나오고 한일정상회담에 후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일본의 교과서에서 다시 역사가 지워지고 있습니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더욱 명확해지고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거나 대폭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강제징용의 '강제'표현이 희석되게끔 표현하는 등 자신들의 전쟁범죄역사를 더욱 부정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여전히 강제징용 해법안에 대해서도 철회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평화나비는 학내에서 학우들의 의견을 모아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고 강제징용해법안을 철회하라는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으고자 합니다. 다음 주에 릴레이 학내 수요시위를 열어 대학생들이 강제징용 해법안을 반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리고 정부가 이를 철회하도록 투쟁할 예정입니다.
지난 15일, 처음 시국선언을 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평화나비 활동만으로도 눈총을 받았던 저희 학교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두려웠습니다. 시국선언 당일까지도 용기가 나지 않아 근심 걱정을 가득 안고 시국선언 장소로 갔습니다. 그때, 함께 시국선언을 진행해줄 친구들을 마주하자, 여태 저를 짓누르던 두려움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 기억으로 다음주 수요일, 학교 캠퍼스 한가운데서 수요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단지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 안과 밖, 내 주변 모든 곳에 함께하는 친구들을 떠올리면 어떤 활동도 망설일 이유가 없어집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긴 투쟁 동안 지치고, 두렵고, 무력한 날이 하루쯤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들에 억눌릴 때면 잠시 잊었던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외롭지 않은 투쟁을 하십시오. 저를 비롯한 대학생 모두도 여러분 곁에 있을 사람들입니다. 오늘 수요시위가 끝난 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떠올리며 온 마음으로 함께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