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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1일차 활동
정식명칭 부산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공식사죄등청구사건(관부재판)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2박3일 일본 후쿠오카와 시모노세키를 찾아갔습니다.
영화 '허스토리'로 알려진 '관부재판'은 일본군성노예제피해자 세분과 근로정신대피해자 일곱분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공식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재판이자 일본에서 제소된 일본군성노예제재판 중에 유일하게 일부승소(일심)를 쟁취한 재판입니다. 이번 방문 목적은 1992년 12월 25일 일본 야마구치지방법원 시모노세키지부에 제소해 2003년 최고재판소 최종 판결까지 10년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된 투쟁을 당시 직접 할머니들과 함께 하신 일본 시민활동가들, 변호사의 활동을 통해 좀 더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자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첫날 오늘은 후쿠오카와 2심 히로시마 재판을 지원한 활동가들과 만났습니다. 당시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젊으면 젊은 40. 50대에 이 운동을 시작하셨고 이제 중심에서 활동하셨던
분은 70대가 되고 몇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없는 것은 우리 할머니들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제대로 기억을 기록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시민모임분들과의 인터뷰에선 재판하게 된 계기부터 당시의 할머니들의 모습과 재판을 통해 활동가가 되신 할머니들 이야기, 할머니들과 재판투쟁하면서 변화된 일본사회의 모습 등 짧은 시간나마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vc_column_text][spacing desktop_height="50" mobile_height="30" smobile_height="20"][imagesgrid image_crop="rectangle" images="4121,4122,4123,4124"][spacing desktop_height="50" mobile_height="30" smobile_height="20"][vc_column_text]
후쿠오카 2일차 활동
아침 일찍 서둘러서 후쿠오카에서 시모노세키로 이동하였습니다. 남양군도. 대만. 인도네시아 등 에서 위안부의 삶을 살으셨던 할머니들의 증언 속에 언제나 나오는 시모노세키. 당시 시모노세키는 강제연행의 불법행위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부재판에서의 '관'이 바로 시모노세키를, '부'는 부산을 지칭합니다. 시모노세키 항에는 지난 70여년전의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는 않으나 어디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을 그녀들이 떠오릅니다.
시모노세키에서는 문옥주 할머니가 전쟁시 버마에서 맡겨둔 군사저축예금을 찾기위해 활동한 시민모임의 대표이셨던 히로사키 류 님을 만났습니다. 류 선생님 댁에서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자이니치 친구들을 통한 일본의 전후보상 책임을 깨닫고 활동을 전개하게 된 개인 활동의 시작. 시민모임의 전개 및 활동과정. 할머니와의 추억. 운동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성과등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간 활동하면서 수집한 여러가지 귀중한 자료를 기증받았습니다.
오후에는 하카타로 넘어와 관부재판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이박성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변호사님은 관부재판을 일본정부에게 전후보상에 대한 공식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진행된 재판이라고 명명합니다. 비록 사죄와 배상을 받지는 못했고 입법부작위의 책임 이라는 일부승소를 얻게된 관부재판이었습니다. 변호사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동경이 아닌 지방재판소인 시모노세키 재판소를 선택한 이유. 재판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일본정부의 도의적 의무책임. 입법부작위 등의 내용등에 대해 상세한 법률적 내용. 재판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 재판의 성과. 재판이 일본사회에서 전후보상운동에 관한 시민운동과 소송활동. 국회. 일본정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등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들을수 있었습니다.
이 변호사님은 한분의 할머니가 살아계실때라도 일본정부가 조속히 사죄를 해야 하는데 피해자가 죽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증언자가 사라질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치구조를 변화시킨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빨리 올수 있다면서 일본사회에서의 새로운 활동을 만들어야 하며 그 길에 양국의 시민사회의 연대가 중요함을 이야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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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3일차 활동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으셨던 하나후사 토시오님과 그의 부인 에이코님을 토시오님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정대협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거주하셨고 관부재판 원고 중에 하나였던 이순덕 할머니를 일본에서 방문하러 오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방문에 맞춰 그간 활동을 기간마다 정리하신 사진첩. 관련 자료들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준비해 주신 유기농 자연식 밥상을 함께 나누고 장장 약 5시간 동안 순차통역으로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관부재판을 준비하던 담당 변호사님과의 첫만남. 이길수 없는 재판이지만 이후 전후보상운동에 큰 역할을 할것이다. 그러니 원고로 참여하는 10명의 한국 피해자들의 법정참여를 위한 항공비. 여비등에 대한 재정지원. 시민사회가 이 재판에 방청으로 홍보로 활동연대 등의 여러가지 협력과 지원해 달라는 변호사들의 요청에 적극적인 활동으로 참여. 재판 원고로 참여하신 할머니 개개인에 대한 기억과 추억. 10여년의 재판(1심 시모노세키. 2심 히로시마 고등법원. 3심 동경 최고재판소)에서의 시민모임 활동과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활동. 재판지원활동과정에서의 이슈로 등장한 국민기금. 역사교과서 왜곡. 입법운동 등을 어떻게 참여하고 활동해 나갔는지 등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일본군'위안부', 전후보상 등의 문제해결을 위한 약 30여년간 일본 시민사회 운동을 개인의 활동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vc_column_text][spacing desktop_height="50" mobile_height="30" smobile_height="20"][/vc_column][/vc_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