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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소식6월 할머니 방문기: 할머니의 기억과 함께 걷기

새벽 6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알람 소리에 일어났습니다. 이른 시간이지만, 할머니를 만날 생각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오늘은 포항에 계시는 박필근 할머니를 뵈러 가는 날입니다. (지난달 할머니 방문기 클릭!)

“할머니~!” 도착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할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읍내로 출발했습니다.

고디탕 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할머니께서 “정대협이는 어디갔어~?” 하고 물어보십니다. 주차하느라 아직 합류하지 못한 행 활동가는 할머니에게 “정대협이”입니다. 빨리 정대협이를 데리고 오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어디 즈음 오셨나 빼꼼 식당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봅니다. 정대협이를 기다리는 사이, 할머니가 나머지 활동가의 성을 물어보십니다. “김가, 백가요!” 하고 말씀드리니 할머니가 “그래 정대협이는 정가고~”라고 하십니다. 웃음을 터트리며 행 활동가의 본래 성을 알려드렸지만, 할머니에게 애정어린 “정대협이”로 남는 것도 좋겠다 생각해봅니다.

맛있는 고디탕을 흡입하느라 정신없는 제 옆으로 행, 지우 활동가는 할머니를 챙겨드리느라 바쁘게 손을 놀립니다. 탕을 드시기 편하시게 작은 그릇에 덜어드리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생선 뼈를 발라 드렸습니다. 할머니 많이 드시라고 생선을 수저 위에 얹어드리지만, 배부르신 할머니는 “그만 먹는다!” 하십니다.

다음은 할머니가 필요하신 것들을 사러 갈 차례입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마트를 누비는 사이 세재, 수건, 두루마리 휴지, 요구르트, 설탕, 찹쌀 포대, 국거리용 고기, 손님 대접용 커피믹스, 그리고 요즘 피부가 간지럽다고 하시는 할머니를 위한 바르는 바디로션까지 차곡차곡 카트에 쌓여갑니다. “고맙수~” 하시는 할머니께 “할머니~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사람들이 마음 보탠 걸로 사드리는 거예요~!”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비타민 음료를 하나씩 들고 어느새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어릴 적 추억 이야기부터 천신만고 끝에 귀향하신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의 과거 속으로 발을 들여보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베 짜기, 농사일, 나무하기 등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워내셨다고 합니다. 울퉁불퉁한 할머니의 손에 고생했던 시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전 방문기 ‘할머니의 손은 울퉁불퉁’ 읽으러 가기) 궁금한 것이 많아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가도, 할머니의 기억이 이어지면 다시금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함께 헤매다 보면, 우리는 어떻게 피해생존자들의 발화를 마주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역사부정세력의 편협한 가해자 시각을 넘어, 피해생존자들의 다층적인 이야기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 그리고 차마 꺼내시지 못한 말들에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할머니와 함께 기억의 길을 걸으며 손을 잡아드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강인한 따스함처럼, 저도 따뜻한 연대의 마음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하리라 다짐해봅니다.

필근 할머니를 뵈러 오면 빠지지 않는 루틴이 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화투시간인데요! (이전 방문기 다음은 화투다! 필근 할머니의 루틴 따라잡기읽어보기) 이 화투판에서 계속 이기면 할머니가 시무룩해 하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었죠. 그러나 화투를 난생처음 쳐보는 저는 멋모르고 좋은 패들을 계속 따버렸습니다. 카드들을 매치하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만 인생 첫 화투판을 이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울까지 천리길이니 얼른 출발해야 한다는 할머니의 걱정에도 “두 판만 더해요!” 하고 외쳐봅니다. 남은 두 판은 할머니가 이기시도록 해야지 마음먹었지만, 생각보다 완급조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지우 활동가가 마지막 판 점수를 셀 때 제 카드 몇 장을 몰래 뒤로 숨겨버렸어요. 결과는 할머니의 승! 마지막 판을 할머니가 기분 좋게 이기실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할머니 댁을 떠나기 전, 지우 활동가가 종이와 펜을 가져와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방문한 활동가들의 이름과 각자의 특징을 살린 귀여운 얼굴 그림을 그려드렸습니다. “정대협,” “박필근”도 넣어서 완성! 할머니한테 자랑하고 나서, 안방 잘 보이는 곳에 종이를 세워두었습니다. 오늘 뵈러 간 저희도, 저희와 함께한 시간도 할머니께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의 기억의 길에 작지만 행복한 추억들을 만들어드릴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다음에 또 즐거운 추억을 만들때까지, 건강히 계세요 할머니!

지우 활동가가 그린 박필근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