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수요 시위1698차 수요시위_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169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의 주관은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 하였고 사회는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한 아녜스 수녀님이 보았습니다.

 

정의연 활동가들의 <바위처럼>에 맞춘 힘찬 율동으로 수요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남궁 라우렌시오 수녀님의 주관단체 인사말 후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의 주간보고가 있었습니다.

 

연대발언으로 수요시위를 이어갔습니다. 한국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회 위원장 박 여호수아 수녀님이 연대발언을 하시고 군산 회현중학교 3학년 학생들 네 팀이 이어 발언하였습니다. 1반 권해인, 박주혁, 이예린, 이호천, 2반 박소현, 이가현, 정하은, 조슬기, 3반 마가은, 박윤서, 안예준, 그리고 멀리 독일에서 온 에밀리와 3학년 김나혜 학생이 영어와 한국어로 힘찬 연대발언을 하였습니다.

 

문화공연이 이어졌습니다. 군산 회현중학교 학생들이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오카리나 연주를 하였습니다. 맑은 오카리나 소리가 혐오로 뒤덮인 평화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화공연이 있었습니다. 주관단체에서 준비한 모자이크 조각을 참가자들이 골고루 붙여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평화로운 그림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참가단체 소개 후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김 레오 수녀님과 보혈선교수녀회 권 마리아 수녀님이 성명서 낭독을 하고 끝으로 성가소녀회 의정부관구 수녀님들이 <꽃>을 합창하며 1698차 정기 수요시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보혈선교수녀회, 군산 회현중학교,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조국혁신당 여성위원회, 평화나미 네트워크, 에밀리 호프(독일), 안나 응우옌(베트남), 천주섭리수녀회,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주관단체), 성령강림사도수녀회, 예수그리스도수도회, 스승예수제자수녀회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수어 통역은 현서영 님께서,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주관단체 인사말_남궁 라우렌시오 수녀(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안녕하세요! 소개를 받은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남궁 라우렌시오 수녀입니다.

 

정의기억연대가 주최하고,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 주관하는 169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마음을 모아주시고, 이곳으로 발걸음 해주신, 현장과 온라인으로 함께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톨릭 천주교회는 지금 가장 큰 어른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활대축일을 보내고 엠마오를 떠나는 날인 21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종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생전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이셨습니다.

 

즉위 이듬해인 2014년 한국 방한 기간중에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셨습니다.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시고, 희망 나비 뱃지를 달고 미사하시는 모습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 주요뉴스로 전파되었습니다.

 

교황님은 방한일정 후,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여성들도 착취당하고 노예가 됐지만, 이 모든 고통에도 존엄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국 민족은 침략을 겪고 모욕을 당했지만 인간적인 존엄을 잃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이 천국에 들어가실 때 가장 먼저 마중나오는 무리는 전 세계의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지 않을까요. 천국에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피해 할머니들도 버선발로 마중나오셨겠지요. 당시 교황님을 만났던 김군자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 김양주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는 천국에서 교황님과 더욱 기쁜 재회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 세상을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천국에 계신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을 기억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힘이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더 더욱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한국 천주교 여자 수도자들은 일본정부가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와 법적 배상하여 할머니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역사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그 날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박 여호수아 수녀(한국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회 위원장)

안녕하세요,

오늘 수요시위를 주관하는 저희는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입니다.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는 1995년 11월 제28차 정기총회 결의문에서,

한국 여성들의 위치를 밝히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찾고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여성상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살고, 일하고, 노력할 것인지에 대해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여성 수도자들은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인

일본군 성노예로 희생된 할머니들의 요구가 곧 우리의 요구임을 인식하고,

그 요구가 관철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1996년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오늘까지 매 주 빠짐없이 수요시위에 참가하여,

피해 생존자들의 외침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를 연결해 주며, 또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살아야 할 바를 살아가도록 이 시간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한분 두분 할머니들께서 한을 간직한채 이 세상을 떠나셔도,

그들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에 있을 것이며,

우리의 기억은 또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로, 침묵으로 숨어있어야만 했던 피해자 할머니들이

세상으로 나오시며 증언하시기 위해 가져야했던 그 용기와 위대함에 존경을 드리며,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위해 우리 수도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힘차게 걸어갈 것입니다.

 

파괴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고,

피괴의 힘이 기승하는 것을 막으며,

참댜운 인간성을 회복하고 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고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


연대발언_권해인, 박주혁, 이예린, 이호천(군산 회현중학교 3학년 1반)

안녕하세요. 오늘 수요 집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 저희는 회현중학교에 재학 중인 권해인, 박주혁, 이예린, 이호천입니다. 저희는 일제강점기 속 아픈 역사인 위안부를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연설을 통해 우리가 이 문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위안부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가요?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들입니다. 위안부에 있었던 여성들은 일본군이 정한 군 위안소 규정, 군인과 군 위안소 업자의 통제와 폭력 등에 노출된 노예적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 여성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아무것도 모른 채 위안소로 끌려와 반항할 수 없었던 강압적인 명령,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별과 폭력 속에서 공포를 넘어선 두려움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위안부에게서 해방돼 살아가고 계신 생존자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나눔 쉼터에서 생활 중이신 길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위안부의 인권 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며 위안부 피해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또 이 할머니는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동안 당한 고초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고 허리도 아프고 매일 약으로 버티고 있다. 죽기 전에 일본이 사죄와 배상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소망했습니다. 국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24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233명은 생전 그토록 바랐던 일본 정부의 사죄 말을 듣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에게서는 해방되었을지 몰라도 아직 일본 정부의 완전한 사과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직접적인 피해자 할머니분들의 증언을 듣고도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저희는 연설을 준비하며 ‘나는 수요일의 소녀입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시기 아픔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그동안 겪은 고통을 말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알게 되었고, 할머님들이 고통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는 수요일의 소녀입니다’ 를 통해 저희는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잊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최근 우리는 현 정부('우리라 부를 수 없는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만하고, 또 왜곡하고 있습니다. '우리라 부를 수 없는 이들'은 우리가 고통받았던 역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선대의 역사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이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이제는 좀 잊을 때가 되지 않았냐고. “여러분, 이게 정말 납득 가능한 말입니까?” 우리 국민 모두는 단 한 번도 일본에 사과받지 못했습니다. [국가]일본은 돈이 필요한 '우리라 부를 수 없는 이들'에게 돈을 쥐여주며 형식적이기만 한 사과로 우리 모두를 기만합니다. [국가]일본이 행한 짓은 [국가]일본이 일제로 돌아가 현세대의 친일파에게 "[국가]대한민국에서 다시 한 번 잘 해봐."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국가]대한민국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들에게 말로만 반성하며, 사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며, 다시는 그런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진심 어린 사과와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분들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또 요구해야 합니다.


연대발언_박소현, 이가현, 정하은, 조슬기(군산 회현중학교 3학년 2반) 

안녕하세요. 저희는 전북 특별자치도 군산시 회현중학교에서 온 정하은, 조슬기, 박소현, 이가현입니다. 오늘 저희가 이곳에 서게 된 이유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잊혀서는 안 될 아픔을 기억하고, 그 아픔이 가져온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힘쓰자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각국의 소녀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였던 그분들은, 평범한 일상과 꿈을 빼앗긴 채 참혹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와 아무런 배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함께 울고, 함께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일본은, 약 93년 전, 조선의 어린 소녀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 심지어 네덜란드 소녀들까지 위안부로 끌고 갔습니다. 신체적 폭력으로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하루에도 10명 이상의 군인들과 강제로 성관계를 하게 했으며, 정신적 폭력도 끊임없이 했습니다. 또한 성관계를 피하거나 거부하는 여성들에겐 지속적인 폭행과 괴롭힘 ,고문 더 나아가서 살해까지 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자신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였고, 수용소에서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일제는 더 이상 군위안부가 필요하지 않았고, 군 위안부들을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 일본 등지에 그냥 버려두거나, 참호에 모아 폭파해, 위안부들을 죽이곤 했습니다. 살아서 귀국한 경우에도 성병의 후유증으로 한평생을 고생하고, 대인기피증·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어린 소녀들의 자유와 행복, 미래를 모두 짓밟았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하며 이 사건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일본은 뻔뻔하게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2023년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 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외무대신 가미카와 요코는 이 판결이 국제법 위반에 대한 지위를 국가적 책임하에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이다, 매우 유감스럽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2014년 1월 NHK 회장 모미이 가쓰토는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는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던 일이며, 일본만 비난받는 게 부당하다고 발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를 왜곡시키고 있고, 역사 앞에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사죄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는 지금도 그들의 아픈 기억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별세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모두 그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이 역사적 사실을 절대로 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 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 할머니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진심을 담은 사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지속해서 노력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르고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더 이상 외면되지 않도록, 그리고 후손들이 올바른 사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나갈 것입니다. 그 누구도 선조들의 고통을 잊지 않도록, 그 누구도 과거의 진실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희의 연설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마가은, 박윤서, 안예준(군산 회현중학교 3학년 3반) 

안녕하세요 저희는 전북 특별자치도 군산시 회현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3학년 마가은, 박윤서, 안예준 입니다. 저희는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겪으셨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통을 중학생의 시선에서 발표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 ‘풀’ 이라는 책을 아세요? 저희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정말 슬펐습니다. 이 책은 김금숙 작가님이 평화의 집에 계신 위안부 피해자 이옥순 할머니를 인터뷰하여 생애를 만화형식으로 작성한 만화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닭장 같은 그 방 안에서 할머니께서 하루에 3~40명의 일본군을 받으셨다는 글을 봤을 땐 정말 거짓말 같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러다 문득 "만약 제가 할머니셨다면 얼마나 지옥 같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위안부 피해자라면, 이 책에 나오는 이옥순할머니, 신미자 할머니였다면 어땠을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직접 당하지 않았기에,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그 고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위안부 할머니들은 돈을 벌러 간 것이다, 다 보상받고 끝난 일이라는 끔찍한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왜 못 믿으세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사실이고, 위안소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위안부의 진실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시민, 국민으로서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그대로 느끼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위안부 할머니들 뿐입니다. 옛일 이기 때문에 왜곡된 사실이 몇 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리처드 앳킨슨의 말처럼 사람의 뇌는 끔찍하거나 아주 행복했던 일처럼 강렬한 상황을 장기적으로 기억하는 장기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이 그냥 지나가는 기억이었을까요? 만약 본인이 당했다면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흔한 일로 남을까요? 그 누구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아직도 그 시간속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 돌아왔지만 나를 외면하는 가족, 내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닌데 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이 현재 이런 상황일까요? 지금 우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하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닌, 위안부 할머니들께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가족과 떨어져 지내거나 혼자 남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길거리에 폐지를 줍는 분들도 계시죠.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기억이 담긴 책들만 봐도 지금, 현재 집이 없어 평화의 집에 살고 계시거나, 힘겹게 살고 계신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전부 우리를 위해 노력해주신 어른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되레 욕하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안정적인 의식주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간단히 얘기만 해봐도 위안부는 우리나라의 마음 아픈 역사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일들은 아직 일본에 사과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저희는 일본에 사과받을 때까지 이 위안부 사건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또한 이 사건을 왜곡된 역사로 배워서도 안 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오랫동안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국민,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기억을 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지 않게 도와주세요. 지금까지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에밀리, 김나혜(군산 회현중학교) 

When I was asked to do this speech and started researching about the so-called "Comfort Women" and their treatment from the japanese military, I was once again very shocked about how many human rights violations took place, not just in Germany but the whole world in general. I was also shooked by how the japanese government treated this dark spot in their history, compared to how germany has been dealing with their involvement in world war two. But at first: who are these "comfort women" ? What is their history? How does Japan deal with their history? How are they involved? And what makes their dealing with their history so different from the way how Germany has been treating their history? Let me give answers to all of these questions.

The "comfort women" or better called military sexual slaves are the largest case of government funded human trafficing, that went on from 1932 to 1945. These slaves were about 200, 000 women starting at age 12 and mostly from Korea or China, but also from Japan, Taiwan, the Philippines, Indonesia, Malaysia, Viet Nam, Thailand, East Timor and Dutch east India. As well as European women in japenes territories. It all began when Japan slowly started gaining control over East Asia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consequently asia was constantly at war. In 1932 the japanese millitary realised, that their soldiers became sexually frustrated and this resulted in a restlessness in the camps. To solve this issue they then established comfort houses, which were exclusively for troops and officers. With these houses the officers wanted to make sure that the officers did not rape any other people in their region and teirefore control the behaviour of the soldiers. They also wanted to boost army morale and contain venereal diseases in their troops. In the beginning these houses were filled with voluntary japanese prostitutes, but in the late 1930s they began to reccruit young girls from mostly China or Korea. This by making false promises of work in fabrics, as nurses or laundry workers in Japan. But instead of getting this work, they were then put into these comfort stations and forced to work as sex workers for the japanese millitary. Later on some girls did not even come to Japan by false promises, but by being forcebly taken from their fields and instantly shipped to Japan.

The conditions in these stations were brutal. The women were permitted to talk to eachother and were forced to have sex with soldiers. They were given different names and permitted to talk their national language to make sure, that nobody knew that they were there unwillingly. If they tried to escape they were either brutally hit or instantly killed in front of the others, to make sure, that the others would not try to make an escape as well. So considering all these horrors I was very shocked about how the japnese government deals with the history now. They still up until this day did not apologise for the horrors these women had to endure, during a government organised crime. But apart from not apoligising to the victims,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tries to earasing the history, by removing it from textbooks for students or rewording things like " many women became comfort women for the japanese millitary " to just " many women became comfort women". These changes have a big impact on this issue, because if it does not get adressed correctly, how are the people suppose to know what really happened during this time.

After some reflecting, I then realised than I was so shocked, because I was not used to a country denying its history. In Germany you grow up with a confrontation with the holocaust from a very young age. We have special holidays to remember those who were tortured and murdered during world war 2. Every year on January 27th, the day Ausschwitz was freed by the American soldiers, we remember those murdered in the concentration camps. On this day our president and other different important people hold a speech as well as a Holocaust survivor. But not just on this special holiday, also in schools you talk about the horrors that happened. During long on going history lessons we talked about the involvement of the german government in killing millions of people and the responsibility we have to make sure that the history will never be forgotten and that something like that never happens again.

In conclusion the history of the government funded comfort stations and mostly the women who had to endure these horrors should never be forgotten and I think it is a terrible fact that up until today, the japanese government does not reflect or even aknowledges their own involvement in those crimes. I think that even though germany also still has some open questions they should speak up about, the german government and people are doing the best to make sure that the crimes of the Holocaust will never be forgotten.

I think this is a very important step, because acknowledging the guilt does not mean being guilty, it means being aware of the past involvement and making sure we are better than our ancestors and these crimes will not happen again. In the end it is not our fault that this happened, but our history and responsibility to carry.

 

이 연설을 맡게 되어 이른바 ‘위안부’와 일본군의 처우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독일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얼마나 많은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일본 정부가 그들의 역사 속 어두운 부분을 대하는 방식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해 매우 다르다는 점에서도 놀랐습니다. 우선, “위안부”란 누구인가요? 그들의 역사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이 역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에 연루되었고, 왜 독일과는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하고 있는 걸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답해드리겠습니다.

"위안부", 혹은 더 정확히는 군 위안 성노예는 정부가 자행한 가장 대규모의 인신매매 사례로, 1932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피해 여성은 약 20만 명에 달하며, 대부분 12세부터 시작해 한국과 중국 출신이었지만,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동티모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그리고 일본의 점령지에 있던 유럽 여성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이 20세기 초 동아시아를 점차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졌고, 그 결과 아시아는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32년, 일본군은 병사들이 성적으로 좌절감을 느끼며 부대 내 불안정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소’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이 위안소는 병사들과 장교들만을 위한 시설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강간을 막고 병사들의 행동을 통제하며 사기를 높이고 성병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자발적인 일본인 매춘부들이 위안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주로 중국과 한국에서 어린 소녀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공장 노동, 간호사, 세탁부 등의 직업을 제공한다는 거짓 약속에 속아 일본으로 오게 되었으며, 결국 위안소에 배치되어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거짓말조차 없었고, 들판에서 강제로 납치되어 바로 일본으로 보내지는 경우도 있

었습니다.

위안소의 환경은 참혹했습니다. 여성들은 서로 대화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군인들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원치 않게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할 경우, 다른 여성들 앞에서 잔인하게 구타당하거나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이들의 탈출 시도를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끔찍한 현실을 고려할 때, 저는 오늘날 일본 정부가 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 여성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범죄였음에도 말입니다. 사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는 이 역사를 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많은 여성이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표현을 단순히 “많은 여성이 위안부가 되었다”로 바꾸는 등의 방식으로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사안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올바르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시 무슨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이렇게 충격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제가 역사 부정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는 아주 어릴 때부터 홀로코스트와 마주합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중 고문당하고 살해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특별한 기념일이 있습니다. 매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미군에 의해 해방된 날에는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이날에는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연설을 합니다.

이런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에서도 끔찍했던 과거에 대해 배우고 토론합니다. 역사 수업 시간 동안 독일 정부가 수백만 명의 학살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역사를 결코 잊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룹니다.

결론적으로, 정부가 주도한 위안소의 역사와 그곳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정부가 이러한 범죄에 대해 반성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물론 독일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독일 정부와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범죄가 잊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조상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이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하고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