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할머니와의 만남(궁금하면 클릭클릭) 이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은근슬쩍 활동가 포카와 행에게 할머니와 약속한 꽃놀이에 데려가 달라며 어필했습니다. 포카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산발'. 3월이 지나고 어느새 4월 16일, 드디어 할머니와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15일에는 정말 바빴습니다. 다음날 할머니께 가려면 미리 일을 끝내두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참,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다음날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 하더니 어느새 부슬 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게 정말 있나봅니다.
나들이는 못 가지만 할머니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마음을 달래보았습니다.
출발 전에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는 일은 언제나 포카의 몫입니다.
"할머니 마포에요~ 저희 이제 출발해요!"
경기도 할머니에게 포카는 언제나 마포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벌써 두 번째라고 이제 낯설지 않은 아파트 문 앞에 서서, 배에 힘을 딱 주고 "할머니~"하고 소리치니 먼저 번과 달리 금세 문이 열립니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먼저 할머니 드리려고 준비한 검은색 손가방과 잘게 썬 고기를 건네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기뻐하시는 듯 하다가, 돌연 저희를 꾸짖으십니다.
"이잉, 쯔…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아마 이때 누가 저희 셋의 얼굴을 봤다면, 머리 위로 물음표 백 개는 떠있다 말하지 않았을까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저희 셋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할머니를 볼 뿐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저희에게 먹일 게 있다며 다시 냉장고로 향합니다. 저희는 또 말려보지만 역시 꿈쩍 않으십니다(어쩐지 데자뷰가…). 그런데 할머니께서 내온 포도는 모양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포도알이 꼭 길쭉길쭉 작은 가지들 같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포도에 토끼눈을 뜨고 있으니, 촌스러운 우리들을 위해 할머니께서 차근차근 설명해주십니다.
"요게 그냥 포도가 아니야. 외국에서 온 놈이야. 그래서 외국 사람들 마냥 키가 커~."
할머니 설명을 들으니 절로 수긍이 갑니다. 포카와 행도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할머니 집 음식은 언제나 무한리필입니다. 포도를 먹는 동안에도 할머니께서는 옆에 비타민 음료박스를 두고 저희들을 살펴보시다가, 음료 병이 바닥을 보이기가 무섭게 새 것을 주십니다.
"할머니 우리가 이거 다 먹으면 할머니는 뭐 드세요?" "맞아요. 할머니 저 더 먹으면 살쪄요. 할머니 드세요."
활동가들의 걱정스러운 말에 할머니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먹을 것도 안 챙겨놨을까봐? (너희들이)먹어야 (내가) 맘이 편하지! 외상해줄테니 남기지 말고 다 가져가!"
경기도 할머니를 뵙는 날은 언제나 갈 때보다 올 때 가방이 더 무겁습니다. 가방에 온 정이 가득합니다.
턱이 아파서 씹는 게 불편하시다던 할머니는 그간 치과를 다녀왔다고 하십니다.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지만, 왠지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게장은 맛있게 드신다고 하니 다음에는 게장을 가져와야겠다고 행과 포카는 다짐합니다.
오늘 못 간 나들이, 다음에 어디로 갈까 여쭤보니, 영 시큰둥하십니다. 그러다 할머니 고향, 충청도 이야기에 화색이 돕니다. 할머니는 고향이 그리우신 걸까요? 할머니는 뒤이어 고향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같이 끌려간 친구들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광복 후에) 돌아와서, 같이 끌려 간 친구네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 친구 한 명은 자살했어. 안 가면 아버지를 끌고 가고 다 죽인다는데 어떡해, 누가 아버지를 보내, 그러니까 내가 갔지…"
할머니는 16살 무렵 일본군에 끌려가 사할린에서 3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로 지내야 했습니다. 고향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오래전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 놓으시던 할머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말을 줄이십니다.
'뭐 좋은 거라고 그걸 말해…'
듣는 포카도, 저도 눈물이 고입니다.
할머니에게 고향은 포근하고, 그리우면서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들께서 겪은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 무거움이 제게는 생소한 것이어서 후기를 정리하는 지금도 이야기를 듣던 그때가 생생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와 더 가까워진다면 이 무게를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할머니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드려야 할까요?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엔 할머니와 꼭 나들이를 가야겠습니다.
지난 번 할머니와의 만남(궁금하면 클릭클릭) 이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은근슬쩍 활동가 포카와 행에게 할머니와 약속한 꽃놀이에 데려가 달라며 어필했습니다.
포카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산발'.
3월이 지나고 어느새 4월 16일, 드디어 할머니와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15일에는 정말 바빴습니다. 다음날 할머니께 가려면 미리 일을 끝내두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참,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다음날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 하더니 어느새 부슬 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게 정말 있나봅니다.
나들이는 못 가지만 할머니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마음을 달래보았습니다.
출발 전에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는 일은 언제나 포카의 몫입니다.
"할머니 마포에요~ 저희 이제 출발해요!"
경기도 할머니에게 포카는 언제나 마포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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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번째라고 이제 낯설지 않은 아파트 문 앞에 서서, 배에 힘을 딱 주고 "할머니~"하고 소리치니
먼저 번과 달리 금세 문이 열립니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먼저 할머니 드리려고 준비한 검은색 손가방과 잘게 썬 고기를 건네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기뻐하시는 듯 하다가, 돌연 저희를 꾸짖으십니다.
"이잉, 쯔…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아마 이때 누가 저희 셋의 얼굴을 봤다면, 머리 위로 물음표 백 개는 떠있다 말하지 않았을까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저희 셋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할머니를 볼 뿐입니다.
"가방 속이 비었잖어!"
할머니는 부러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터는 시늉을 하십니다.
뜬금없는 장난에 포카는 '아이구, 제가 깜! 빡! 해버렸어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합니다.
할머니는 그런 포카에게 딱콩으로 응징(?)하십니다.
할머니의 장난이 날로 느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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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집 도착.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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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저희에게 먹일 게 있다며 다시 냉장고로 향합니다. 저희는 또 말려보지만 역시 꿈쩍 않으십니다(어쩐지 데자뷰가…).
그런데 할머니께서 내온 포도는 모양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포도알이 꼭 길쭉길쭉 작은 가지들 같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포도에 토끼눈을 뜨고 있으니, 촌스러운 우리들을 위해 할머니께서 차근차근 설명해주십니다.
"요게 그냥 포도가 아니야. 외국에서 온 놈이야.
그래서 외국 사람들 마냥 키가 커~."
할머니 설명을 들으니 절로 수긍이 갑니다. 포카와 행도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할머니 집 음식은 언제나 무한리필입니다.
포도를 먹는 동안에도 할머니께서는 옆에 비타민 음료박스를 두고 저희들을 살펴보시다가, 음료 병이 바닥을 보이기가 무섭게 새 것을 주십니다.
"할머니 우리가 이거 다 먹으면 할머니는 뭐 드세요?"
"맞아요. 할머니 저 더 먹으면 살쪄요. 할머니 드세요."
활동가들의 걱정스러운 말에 할머니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먹을 것도 안 챙겨놨을까봐?
(너희들이)먹어야 (내가) 맘이 편하지! 외상해줄테니 남기지 말고 다 가져가!"
경기도 할머니를 뵙는 날은 언제나 갈 때보다 올 때 가방이 더 무겁습니다.
가방에 온 정이 가득합니다.
턱이 아파서 씹는 게 불편하시다던 할머니는 그간 치과를 다녀왔다고 하십니다.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지만, 왠지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게장은 맛있게 드신다고 하니 다음에는 게장을 가져와야겠다고 행과 포카는 다짐합니다.
오늘 못 간 나들이, 다음에 어디로 갈까 여쭤보니, 영 시큰둥하십니다.
그러다 할머니 고향, 충청도 이야기에 화색이 돕니다.
할머니는 고향이 그리우신 걸까요?
할머니는 뒤이어 고향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같이 끌려간 친구들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광복 후에) 돌아와서, 같이 끌려 간 친구네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 친구 한 명은 자살했어.
안 가면 아버지를 끌고 가고 다 죽인다는데 어떡해, 누가 아버지를 보내, 그러니까 내가 갔지…"
할머니는 16살 무렵 일본군에 끌려가 사할린에서 3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로 지내야 했습니다.
고향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오래전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 놓으시던 할머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말을 줄이십니다.
'뭐 좋은 거라고 그걸 말해…'
듣는 포카도, 저도 눈물이 고입니다.
할머니에게 고향은 포근하고, 그리우면서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들께서 겪은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 무거움이 제게는 생소한 것이어서 후기를 정리하는 지금도 이야기를 듣던 그때가 생생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와 더 가까워진다면 이 무게를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할머니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드려야 할까요?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엔 할머니와 꼭 나들이를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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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져야 할 시간)
또 올게요 할머니!
2021.04.27 활동가 지우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