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수요 시위1733차 수요시위_정의기억연대(추모 수요시위)

1733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의 주최, 주관은 정의기억연대에서 하였고 사회는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이 보았습니다. 2025년의 마지막 날 열린 수요시위는 2025년에 돌아가신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수요시위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의 <바위처럼> 율동으로 수요시위를 시작했습니다.

 

2025년 돌아가신 길원옥 님, 이옥선 님을 소개하고 추모하며 묵념을 했습니다.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시며 길원옥 할머니와도 많은 인연을 맺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 공동대표이며 희망씨앗기금 대표이사이신 양징자 님이 일본에서 보내주신 추모사를 정의기억연대 도담 활동가가 대독했습니다. 이어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홍은미 부관장님이 이옥선 할머니를 기억하며 추모사를 해주셨습니다.

 

추모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충북 민예총 민족 춤패 너울의 오세란 님이 두 할머니를 추모하는 <끝나지 않은 노래> 춤을 춰 주셨습니다.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김샘 평화나비 네트워크 전 대표님이 길원옥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추모사를 해주셨고, 자원활동가이자 빅이슈코리아 상임이사이시며 이옥선 할머니와 가족, 친구처럼 지내셨던 안병훈 님이 중국에서 보내주신 추모사를 정의기억연대 복아 활동가가 대독했습니다.

 

두 번째 추모공연으로 정의기억연대 감자 활동가가 <상사화>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가단체 소개 후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성명서 낭독을 하고 참가자 모두 길원옥 님, 이옥선 님 앞에 헌화하며 1733차 수요시위를 마무리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윤철우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 조선일보폐간시민실천단, 나눔의집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박의선, 서초팀 석철TV, 이윤희, 조국혁신당 여성위원회, 일송김동삼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천주의성요한수도회, 파란숨과가마꾼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 ㈜이로운넷, 징보당 상임대표 김재연, 김민승, 고명희, 만공TV, 청년광장 안유미, 길태윤, 마리아 텔 필라 알바레즈(<할머니, 한국 할머니들의 혁명> 책을 쓴 아르헨티자 작가), 윤홍열, 극단 경험과상상, 김복동의 희망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온라인 댓글로는 이원석-b6g, 조안구달, salmi-however, 남수민-u5e, 제2독립군TV, r작은꽃-e9o, 장상욱-e1q, lee8152, fcws_au 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수어통역은 현서영 님이,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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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_양징자 일본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 공동대표, 희망씨앗기금 대표이사

“전쟁이 없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길원옥 할머니가 처음 일본에 오신 것은 2003년이었지요. 그 때 여러번 저희에게 당부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할머니는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저와 같은 사람이 다시 생기면 안 되니까, 전쟁이 없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어린 말씀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려 순식간에 수많은 ‘길원옥 팬’을 만들어냈지요. 그 후에도 할머니는 우리가 요청할 때마다 일본에 와 주시고, 오실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사람들을 매혹하는 할머니의 그 힘은 어디서 났을까요?

“할머니, 할머니의 말씀을 통역하니까 저자신이 아주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할머니의 말씀을 일본말로 옮기면서 제가 드린 말씀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착하다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정말 소중한 말이에요. 말을 착하게 하면 착한 말이 돌아오고, 말을 착하게 하면 세상이 착하게 되니까요. 세상이 착하게 되면 평화로운 세상이 되니까요”

그 말씀을 들은 일본 학생이 “할머니 아름다우세요”라고 말하자 정말 곱게 활짝 웃으신 할머니의 미소가 떠오릅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그 모진 아픔을 겪으셔야 했던 할머니이기에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진심으로 바라신다는 것, 그것을 위해 아픈 몸을 끌고 싸우신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할머니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 조용하고 상냥한 말투 뒤에, 그 너그로운 미소와 몸짓 뒤에, 얼마나 많은 설움과 아픔이 숨어있는지를 짐작하기에 사람들은 할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 했습니다.

조국의 분단 때문에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부모형제와의 상봉도 이루지 못한 할머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사람들이 눈치 챌까봐 스스로 죄인처럼 사셨다는 할머니, 하지만 용기있게 사람들 앞에 나서신 후로는 자신의 그 상처들을 조금씩 치유하며 사람들의 상처까지 보듬는 따뜻한 평화운동가가 되신 길원옥 할머니.

할머니의 그 아프고도 따뜻한 삶의 여정은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그 간절한 염원 또한 가슴에 새겨 꼭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약속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할머니께 드립니다.

할머니, 늘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해 주신 할머니, 늘 평화가 깨질까봐 세상 걱정이 많으셨던 할머니, 잊은 척 하시면서 당신의 과거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신 할머니, 이제 모든 근심 걱정 털어놓으시고 편히 잠드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아픔없이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추모사_홍은미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부관장

이옥선 할머니는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인해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아주 어린 소녀였던 나이에 세상의 폭력과 마주해야 했던 분이셨습니다.

 

1940년,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집을 나섰지만,

중국 길림성 연길로 끌려가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일본군‘위안부’로서 참혹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해방 뒤 타국에서 결혼과 이별, 생계를 이어가며

모진 삶을 살았습니다.

2000년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였던 나눔의집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같은 아픔을 겪은 벗들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알면서도

끝까지 증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국내외를 오가며 직접 증언의 자리에 섰고,

수요집회를 비롯한 연대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끝까지 살아서 사죄를 받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외침은

분노가 아니라 책임이었고,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향한 의지였습니다.

 

나눔의집에는 이옥선 할머니뿐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 할머니들께서 더불어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증언의 현장에 함께 나섰고,

수요집회를 비롯한 연대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도록, 통증의 역사를 증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23년 8월 12일,‘기림의 날’ 기림식에서

이옥선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어서 모든 것이 고맙다.”

“나는 죽어서도 먼저 떠난 벗들과 함께 일본국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책임을 원하기에

나눔의집에 묻혀있는 친구들 곁에 묻히고 싶다.”

 

2025년 5월 11일, 이옥선 할머니는

긴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끝내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영면하셨지만,

할머니의 삶과 증언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나눔의집은 이옥선 할머니와 먼저 떠나신 모든 할머니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20여 년전에도 제514차 수요집회를 주관하며

이 거리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목소리를 낸 바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어졌던 연대의 끈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정의기억연대에 감사드리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 앞장서 온 모든 분들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나눔의집은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해 이곳에 계셨고, 또 이곳을 거쳐 가신

모든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피해 문제가 잊히지 않도록

또렷하게 그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함께

이옥선 할머니에게 안부인사를 올립니다.


추모사_김샘 평화나비 네트워크 전 대표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수요일이자, 길원옥 할머니를 기억하는 수요일입니다. 이 자리는 작별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어져 온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확인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2년 수요시위에서 할머니를 처음 뵈었고, 이후 평화나비 네트워크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길원옥 할머니는 늘 해사하게 웃으며, 계시는 자리마다 모두에게 힘을 주는 한결같은 분이었습니다.

 

7년 전에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할머니와 함께 영상 촬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노래인 아리랑과 두만강을 부르시고, 저는 할머니 옆에서 그 노랫말을 수어로 전달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노래에 맞춰 수어 연습을 하며 촬영을 준비했습니다. 촬영 당일은 한여름이었습니다. 영상에 소음이 들어가면 안 되었기 때문에, 창문도 모두 닫고 에어컨도 켜지 못한 공간에서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더운 날씨에 촬영과 인터뷰까지 이어지며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할머니는 힘든 내색이나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끝까지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제가 기억하는 가장 길원옥 할머니다운 모습입니다.

 

지치고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운 날씨에도 노래를 부르시던 할머니를, 언제 뵈어도 한결같이 웃으시던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할머니처럼 웃으며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이미 할머니의 그 모습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도 오늘 할머니의 모습을 이어가기 위해 오셨으니까요.

 

할머니, 이제 편한 곳에서 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항상 존경하고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추모사_안병훈 자원활동가, 빅이슈코리아 상임이사

이옥선 안나 할머니를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자이자,

평생을 인권과 평화를 위해 살아오신

이옥선 안나 할머니를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할머니,

이제는 주님의 품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고통도 없이

평안히 쉬고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할머니는 부산에서 태어나

14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할머니의 삶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는

그 고통을 품고 살아내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

평화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제가 처음 할머니를 만난 것은

2006년이었습니다.

성당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계시다는 할머니 말씀에

주일마다 할머니를 모시고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저를

늘 “손자”라고 주변분들께 소개하셨습니다.

건강이 허락하실 때마다 가셨던 중국 가족 방문 길에는

할머니 보호자로 늘 동행하게 되었고,

남들이 미쳐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해방 후 58년간의 중국 삶을 경험하면서

할머니와는 피보다 깊은 신뢰와

말없이 건네는 애정도 서로 느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이옥선 할머니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연약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유쾌하셨고,

머리가 정말 맑고 총명하신 분이었습니다.

농담을 던지실 때면

순간적으로 상황을 꿰뚫는 재치가 있었고,

말씀을 시작하시면

청중의 눈과 마음을

단번에 붙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원고 없이도,

꾸밈없이도,

진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

울분을 토해내는 대신

조용히, 또렷하게

역사를 설명하셨고,

분노 대신

이해와 책임을 요구하는 언어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수십 년을 견뎌온

놀라운 인내와 품격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보다

남의 아픔을 먼저 물으셨고,

자신의 억울함보다

다음 세대가 짊어질 짐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증언은

복수가 아니라

늘 평화를 향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나는 미워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어느 나라에서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말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할머니가 남기신

평화의 유산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바람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6월, 소멸되었던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58년만에 중국에서 한국에 돌아오신 할머니께서는

25년 동안 전국 각지와 세계 곳곳을 다니시며

힘든 기억을 되살려 증언을 하고 참상을 알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할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비통하고,

여전히 우리 가슴에

무거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증언하고, 교육하고, 연대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자리에 있게 되었고,

이 자리에 함께하는 이들을 통해

언젠가 결국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중국 가족들인 며느리와 두 손자를

끝까지 걱정하셨습니다.

특히 둘째 손자가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할머니의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소원이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는 중국 호적과 회복한 한국 국적상 주민등록이

1년의 차이가 있어, 지금 중국 가족들은

할머니의 친가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할머니의 유산을 받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며,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씀을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성당에 다니며

같이 기도하던 시간들,

조용히 손을 모으고

세상의 평화를 빌던 그 순간들은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옥선 안나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떠나셨지만

할머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슬픕니다.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

역사의 올바른 기록,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권리가

제대로 존중받는 그날까지

할머니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함께 기억하고, 말

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유쾌하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할머니를 닮은 방식으로요.

 

사랑하는 이옥선 안나 할머니,

주님의 품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안나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살아 생전에

증언하며 하시던 말씀으로 추모사를 마치겠습니다.

 

“왜 강제로 끌어가지 않았다고 하느냐?

왜 위안소에 제 발로 갔다고 하느냐?”

 

“조금이라도, 잘못했다는 말이라도 듣고 죽으면,

원이라도 풀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