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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업제11차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이하여, 김학순의 용기를 기억하며,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다시 구축합시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32년 전 8월 14일, 김학순은 증거가 없다며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가해자 앞에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 당당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피해자에게 덧씌워진 낙인과 수치심을 벗어던지고 가해자의 책임인정과 진실규명, 사죄를 당당히 요구하며 세상에 나왔습니다. 다시는 유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했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한일 미래세대가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을 희망했습니다. 김학순 님은 이후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한 최초의 당사자 법적 소송을 이끌었고, 국내외 활발한 증언활동을 펼쳤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피해자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숨죽여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으로 퍼져 침묵했던 수많은 ‘김학순들’을 깨우고, 전 세계 시민들의 공감과 공명을 불러일으키며 변화를 위한 연대로 연결되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실천은 여성인권사의 새 장을 열어젖히며 전시성폭력에 관한 국제인권규범을 세우고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 회복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김학순은 역사의 무게를 담담히 걸머진 채 두려움의 장막을 하나하나 찢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2012년 대만에서 개최된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참가자들은 김학순의 용기를 기리며,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했습니다. 죄 많은 존재, 부끄러워 숨겨야 할 존재, 원통하고 한 많은 피해자에서 여성인권운동가로 거듭나 평화와 인권의 새 길을 개척한 김학순. 그의 용기를 계승하고 역사를 기억할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정의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 불법강점, 강제동원, 일본군성노예제를 부정하며 범죄사실을 부인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피해자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평화의 소녀상 설치 방해와 철거를 조직적으로 획책하며 교과서 왜곡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1965년 청구권협정」과 「2015 한일합의」를 핑계 삼아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주장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노담화에서 스스로가 한 작은 약속조차 손바닥 뒤집듯 하며 역사를 거꾸로 돌리더니, 적반하장 ‘한일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을 내 놓으라며 피해국을 윽박질렀습니다. 가해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혈안입니다.

국제인권 원칙과 규범에 따라 피해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가해국의 책임을 물어야 할 한국 정부는 ‘2015 한일합의 정신 준수’를 운운하며 화해치유재단 부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굴종외교, 자해외교로 일관하더니 마침내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헌법을 형해화 하고 주권국가로서 자존심도 내팽개친 채 가해국 일본의 편에 서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봉하고 인권운동의 역사를 지우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를 강행하고자 하는 일본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일본국의 이해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반민족, 반인권, 반평화 인사들을 권력 핵심부에 전면 배치해 시민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탄압하고 비판적 언론을 겁박하며, 우리 선조들이 쌓아 올린 자랑스러운 역사를 뿌리 째 흔들고 있습니다.

이에 부화뇌동한 국내 극우 역사부정 세력은 매주 수요시위 현장에 나와 일본 우익들의 주장을 반복하며 피해자를 모독하고 활동가들과 평화의 소녀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평화의 장을 절망과 갈등으로 얼룩지게 하고, 사랑과 연대의 마음을 증오와 혐오의 칼날로 찢으며,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던 진실의 함성을 부정과 왜곡의 언어로 훼손하고 있습니다.

신냉전 체제를 방불케 하는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핑계로 일본의 군비증강 및 평화헌법 개정 시도가 용인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퇴행하고 정의는 흔들리며 평화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피해생존자들은 정의실현을 보지 못한 채 한분 두분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슬프고 참담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김학순의 목소리를 듣고, 김학순의 용기를 목도하고, 김학순의 염원을 기억하는 우리는 가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는 세상,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가 무시되지 않는 세상, 여성인권이 존중받는 세상,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 행동합시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기억의 공동체, 정의의 공동체를 다시 굳건하게 세웁시다.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고 치유하며 사랑의 연대로 평화와 인권의 새 길을 다시 열어나갑시다.

2023년 8월 14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