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2차 정기 수요시위는 1월 28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 5주기를 앞두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제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5주기 수요시위 주관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에서 하였고 사회는 정은주 사무국장님이 보았습니다.
수요시위를 시작하기 전 이날 10시에 진행된 전 연세대 류석춘 교수 재판 결과에 대한 정의기억연대 입장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을 한 류 교수에 대한 몰인권적, 몰역사적 판결을 규탄합니다.
본격적으로 수요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할머니를 생각하며 묵념을 하였습니다. 이어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 전국민중행동 상임대표님이 주관단체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소개 후 김숨 작가의 김복동 할머니 증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의 일부분을 낭독하며 할머니를 기억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어 김복동 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할머니를 만나고 함께한 분들의 추모사를 들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에서는 황선진 전 평화나비 활동가님, 송원근 영화 <김복동> 감독님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문화공연에서는 감자 정의기억연대 활동가가 영화 <김복동>에 나온 노래 ‘꽃’을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영화 속 김복동 할머니를 다시 한 번 떠올렸습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의 주간보고를 한경희 사무총장이 대독한 후 연대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최경숙 시민방사능감시센터 활동가님, 김태중 민애청 사무국장님, 박태훈 청년진보당 집행위원장님, 이혜성 진보대학생넷 회원님이 힘찬 연대발언을 했습니다.
연대발언을 하신 세 청년 김태중, 박태훈, 이혜성 님의 성명서 낭독 후 참가단체 소개를 하고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전 참가자가 함께 <바위처럼> 율동을 하며 163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마리아의 딸 수도회, 더나은세상을만드는 청년교사모임 새봄,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역사동아리 겨레랑, 진보대학생넷, 평화나비 네트워크,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기독여민회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온라인으로는 Sung Park(미국 시애틀), 장상욱, Monica Kim(호주 시드니),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이지니, Goo Lee, Yeonhee Sophie Kim, 한덕규, 원 탑, 황정수, lee파도저편, 푸주, 오직믿음 등 여러분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제163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주간보고
오는 1월 28일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평화 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5주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복 받을 복(福), 아이 동(童). 복을 불러오는 아이 김복동은 할머니 인권운동가가 되어 세상에 복을 짓고 복을 나눠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던 아픔, 평생 희미해지지 않았던 상처와 고통,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마음과 실천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겪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매주 수요일 평화로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용기였고 힘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김복동님은 일제 식민지 시기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의 전장에서 일본군‘위안부’로 모진 피해를 입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힘든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1992년, 오랜 침묵 끝에 피해자 신고를 한 김복동님은 이후 유엔 등 국제 사회 곳곳에서 일본군성노예제의 진실을 알리며 전시 성폭력을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인식시키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를 필두로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해 증언했고, 2012년부터는 유엔,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지로 해외캠페인을 다니며 정의로운 외침을 이어갔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수요시위에 함께 하셨고, ‘2015 한일합의’를 반대하며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해 외교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일본 우익과 오사카 시장의 망언에 분노하시며 직접 오사카시를 방문해 “증거가 살아있는데 증거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며 호통 치기도 했습니다.
201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자신과 같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겠다는 평소의 의지를 <나비기금>으로 실현시켰습니다. 나비기금은 베트남, 콩고, 우간다, 팔레스타인 등지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 아이들에게 날아가 삶의 의지와 생존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해자들에게는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고 베트남 전쟁 시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하셨습니다.
김복동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많은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약자들의 존엄과 인권 보호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아낌없이 후원하셨고, 한국과 일본의 자연재해 피해자들,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과 노동자들, 세계 곳곳의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지원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우리의 여정이 구조적 폭력과 차별에 맞서는 수많은 이들의 정의와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바람은 김복동 평화인권상이 되어 청년 세대 활동가들과 학생들의 장학금이 되었습니다. 김복동 연구지원사업이 되어 새로운 자료발굴과 분석의 마중물이 되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기록과 정리, 기억의 전승을 위한 아카이브 구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의 끈질긴 투쟁으로 마침내 작년 11월, 대한민국 고등법원은 일본국의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명했습니다. 김복동은 사랑이고 뿌리 깊은 나무이며 연대이자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김복동 할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일본 정부와 극우 역사부정 세력이 일본군성노예제의 진실을 부정하며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한국 정부가 굴종적 자세로 가해자의 편에 서서 역사정의를 훼손하고 있는 오늘날,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수요시위에서 일본대사관을 향해 호령치던 그 단단하고 우렁찬 목소리, 환하게 웃으며 대학생들의 손을 힘 있게 잡던 모습. 그런 할머니를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서럽기만 합니다.
외롭고 힘들고 상처 입을 때마다, 길을 잃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하소연하고 의지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에 계시다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견디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싸워달라”라는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여성인권·평화를 위해 더 큰 길을 열어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김복동의 용기와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김복동을 기억하는 수많은 양심적인 국내외 시민들이 함께해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2024년 1월 24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_황선진 전 평화나비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2017년도부터 2019년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동아리 평화나비에서 활동했던 황선진이라고 합니다.
평화로에서 정말 평화로운 수요시위가 열렸던 시기,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시위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요시위에 뜸하게 찾아오게 되었는데, 오늘은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곧 다가올 고 김복동 할머니의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평화나비 활동을 하던 시기 내내, 고 김복동 할머니는 제게 있어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 그리고 인권운동가이셨습니다. 종종 수요시위에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는 꼭 앞자리에 앉아 할
머니를 뵙고 싶어했습니다. 발언하시는 모습을 보면 꼭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들기도 했습니다. 화해치유재단 1인 릴레이 시위 때도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할머니께서 시위에 참여하셨다는 소식을 보며, 내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하는 다짐을 새로이 새기곤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화나비 옆에,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을 하는 모든 이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어주실 것만 같았던 할머니의 부고 소식은 저에게 꽤나 힘든 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발언문을 쓰기 위해 제가 평화나비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 김복동 할머니 생전의 모습을 많이 찾아보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꾸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찾아뵐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많이 찾아뵐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할머니는 제 마음 속에서 그립고 뵙고 싶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신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평화나비 활동을 마친 이후 현재 대학생기후행동이라는,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한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은 언뜻 보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결국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께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 재일조선학교 학생들 등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많은 곳들과 연대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기후위기 문제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 김복동 할머니께 하고 싶은 말을 이 자리에서 늦게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김복동 할머니, 할머니를 보며 활동해왔던 저는 여전히 다른 자리에서, 꿋꿋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할머니는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유이자,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동을 지속할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추구하셨던 평화의 가치를 이어 받아, 저는 언제까지나 평화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는 평온하실 수 있도록, 이 문제의 해
결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힘쓰겠습니다. 활동가가 되어주셔서, 그리고 그 덕에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언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_송원근 영화 <김복동> 감독
<기억하고 새기는 첫걸음 “그 이름을 부를 때”>
안녕하세요.
저는 2019년 김복동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하고,
영화를 제작하던 시간을 ‘그 이름을 부를 때’라는 책으로 출간한 바 있는
뉴스타파 송원근 피디입니다.
영화 김복동을 제작하고, 또 취재를 하면서
늘 바라만 보던 수요시위 단상에
제가 이렇게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할머니의 5주기를 앞두고 있는만큼,
제가 느낀 이야기를 짤막하게나마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중에 영화 김복동을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마지막에 내레이션을 한 한지민 배우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이는 아흔넷, 이름은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이름을 가슴에 새겨 남기는 것은
그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은
영화를 제작하는 일년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김복동을 제작할 때도
그 제작 에세이를 책으로 쓸 때도
사람들이 김복동 할머니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첫걸음은,
이름을 부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를 떠나보냈던 5년 전도, 오늘처럼 이렇게 추웠습니다.
오늘처럼 하늘이 무척 파랬고, 겨울 공기는 무척이나 매서웠습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
이 겨울 날씨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진 듯합니다.
일본 정부는 역사를 지우려고 하고 있고
우리 정부는 이제는 덮자고 합니다.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시위는
이제 이렇게 소녀상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씁쓸합니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기에
우리는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더 기억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세상의 더 많은 피해자를 위해 노력하고 싸웠던 모습.
자신이 피해자였기에
스스로 당당하게, 일본정부를 향해 꾸짖고 사죄하라고 외치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래서 더 그립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김복동 할머니가 남긴 희망의 씨앗은 곳곳에 뿌려져 그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이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도 할머니를 기억하고,
어렵고 힘들 때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할머니가 건넨 장학금으로 어렵게 공부를 했던 학생들은,
할머니와 만난 그날의 기억과
할머니의 말씀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상징하는 목련꽃만 봐도 할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손을 잡아주며,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깊이깊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 역시 일본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희망의 씨앗들이,
일본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곳곳, 할머니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의 씨앗들이 무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이름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여러분이 직접 그 희망의 씨앗이 되어
기억하고 새기는 데 앞장서주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김태중 민애청 사무국장
김복동 할머님을 기억합니다. 할머님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장소가 외교부 앞입니다. 수술 후 퇴원한지 얼마 되지않은 몸을 이끌고 외교부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 1인시위를 하시는데, 하필 그날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할머님과 많은 시민들의 투쟁으로 재단은 해체 되었지만 10억엔은 그대로고 한일위안부합의도 공식합의라는 도장을 받으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지금 외교부와 국방부를 보더라도 화딱지가 납니다. 외교부 2차장으로 매국적 한일위안부합의의 주역인 주제에 합의 후 감히 나눔의집을 찾아가 “ 이 이상의 명예 회복은 있기가 힘들다”느니, "코끼리의 다리 하나만을 보지 마시고 전체를 들여다보고 의미를 평가해 달라"느니하는 망언으로 할머니들을 가르치려 했던 조태열.
강제동원 재판도 양승태 대법원과 재판거래를 공모하며 ‘강제동원 재판이 한일관계를 훼손한다’느니하는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하고, 법원행정처 직원과 김앤장을 수차례 만나 재판을 모의한 조태열. 5년을 끌어 결국 이춘식 할아버지 외에 다른 분들은 역사적 승리도 직접 못보게한 역사의 죄인 조태열. 이제는 강제동원 3자 변제안이 훌륭한 안이라며 칭송하더니 결국 외교부 장관이 되는 나라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국방부 정신전력 교재에서 독도는 영토분쟁 지역으로 규정하고 지도에서 지우고, 역사문제는 없는 일 만들고 한일협력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국방부. 강제동원 3자변제 안은 한일 관계 해법이라는 국방부 장관 신원식. 이런 자들을 차마 가만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외교부든 국방부든 이렇게 한일과거사 문제를 무슨 짐짝 취급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한일 관계 복원이란 바로 한미일군사동맹입니다. 지난 1월 15일부터 사흘간 제주 남방에서 ‘떠다니는 군사기지’ 미국 항공모함과 함께 한미일해상훈련이 진행됐습니다. 북측을 겨냥한 이 훈련에 이미 모두 예상했듯 북측은 대응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한미일군사동맹에 기반해 북한 정권 붕괴, 선제타격, 지휘부 참수작전이 진행된 결과가 지금의 위기의 한반도 현실을 가져왔습니다.
적대가 적대를 부르는 상황이 한반도 평화를 훼손하는 동안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전쟁벨트를 완성하고, 욱일기를 단 일본은 군사대국화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대국의 등쌀에 우리 민족의 권리와 평화가 짓밟혔던 100년 전과 닮아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원합니다 . 저들이 끝내 잘못을 반복한다면 할머니들이 그랬듯, 함께했던 시민들이 그러했는 청년들도 뚜벅뚜벅 싸워 나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김복동 할머님을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박태훈 청년진보당 집행위원장
바로 오늘,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제 피해자들을 “매춘부”라고 이야기했던 류석춘 전 교수가 1심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아홉 분의 피해자가 살아서 피해를 증언하고 있는데,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와 고통을 무시한 판결입니다. 일본 정부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한 류 교수의 발언을 재판부가 용납해선 안 됐습니다. 이번 판결은 학문의 자유를 지킨 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악랄한 2차 가해에 동참하고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작년 11월 이미 우리 사법부는 일본의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확인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해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건 단순히 “통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 스스로 정당성을 무너뜨린 판결입니다. 류석춘을 비롯해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2차 가해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불행해집니다. 강성희 의원 하나는 막을 수 있었겠지만,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일관되게 친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사법농단의 실행자, 강제 동원 재판거래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 인사가 외교부 장관이 되어 “한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나라의 영토를 지켜야할 국방부의 교육자료에는 독도가 빠져있었습니다. 후쿠시마에서 핵폐기물을 바다에 흘려보내는 데,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에 안전하다고 보증을 서주고 있습니다. 기시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한마디도 못하는 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습니까? 한일 간의 올바른 미래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정의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가능합니다.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5주기입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이땅의 평화를 바라셨던 할머님을 따라. 진보당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고, 정의로운 역사를 바로잡는 길에 앞장서겠습니다.
연대발언_이혜성 진보대학생넷 회원
안녕하세요. 진보대학생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공회대 이혜성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학생넷 회원으로 또 역사동아리 사다리 회원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했었는데요.
이번 수요시위는 김복동 할머님의 뜻을 기억하는 추모 주간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 의미가 더욱 깊은 수요시위라고 생각합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수요시위에 참석하시고 암 투병 중에도 위안부 피해자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정부의 대응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1인 시위를 이어 나가셨던 김복동 할머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잡고 살아”라고 하셨던 할머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할머님의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범죄에 대한 사죄와 피해에 대한 배상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일조차 관심을 갖지 않고 외면한다면 다시 싸워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화해치유재단처럼 현 정부에서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안과 독도 문제를 포함한 지속되는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를 보며 이러한 현실이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제가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는, 또 수많은 분들이 수요시위와 함께 연대하는 이유는 이렇게 잘못에 대한 사죄라는 당연해야 하는 일들이 정말 당연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가장 참혹한 순간을 몸소 겪어오신 김복동 할머님은 ‘전쟁 없는 세상’,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일본의 사죄와 정당한 배상과 함께 앞으로의 전쟁범죄를 막기 위해 평화를 외치시며 다른 피해자들을 돕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정당화해도 전쟁중인 나라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참혹한 일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제대로된 사죄와 배상을 하는 그날까지, 이 땅에 전쟁이 멈추고 평화가 깃드는 그날까지, 김복동 할머님께서 임종의 순간에도 외치셨던 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저희가 함께 외치고, 기억하고, 알리겠습니다.
구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632차 정기 수요시위는 1월 28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 5주기를 앞두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제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5주기 수요시위 주관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에서 하였고 사회는 정은주 사무국장님이 보았습니다.
수요시위를 시작하기 전 이날 10시에 진행된 전 연세대 류석춘 교수 재판 결과에 대한 정의기억연대 입장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을 한 류 교수에 대한 몰인권적, 몰역사적 판결을 규탄합니다.
본격적으로 수요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할머니를 생각하며 묵념을 하였습니다. 이어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 전국민중행동 상임대표님이 주관단체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소개 후 김숨 작가의 김복동 할머니 증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의 일부분을 낭독하며 할머니를 기억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어 김복동 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할머니를 만나고 함께한 분들의 추모사를 들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에서는 황선진 전 평화나비 활동가님, 송원근 영화 <김복동> 감독님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문화공연에서는 감자 정의기억연대 활동가가 영화 <김복동>에 나온 노래 ‘꽃’을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영화 속 김복동 할머니를 다시 한 번 떠올렸습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의 주간보고를 한경희 사무총장이 대독한 후 연대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최경숙 시민방사능감시센터 활동가님, 김태중 민애청 사무국장님, 박태훈 청년진보당 집행위원장님, 이혜성 진보대학생넷 회원님이 힘찬 연대발언을 했습니다.
연대발언을 하신 세 청년 김태중, 박태훈, 이혜성 님의 성명서 낭독 후 참가단체 소개를 하고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전 참가자가 함께 <바위처럼> 율동을 하며 163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마리아의 딸 수도회, 더나은세상을만드는 청년교사모임 새봄,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역사동아리 겨레랑, 진보대학생넷, 평화나비 네트워크,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기독여민회 등 개인, 단체에서 함께 연대해 주셨습니다.
온라인으로는 Sung Park(미국 시애틀), 장상욱, Monica Kim(호주 시드니),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연, 이지니, Goo Lee, Yeonhee Sophie Kim, 한덕규, 원 탑, 황정수, lee파도저편, 푸주, 오직믿음 등 여러분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무대와 음향은 휴매니지먼트에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제163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주간보고
오는 1월 28일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평화 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5주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복 받을 복(福), 아이 동(童). 복을 불러오는 아이 김복동은 할머니 인권운동가가 되어 세상에 복을 짓고 복을 나눠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던 아픔, 평생 희미해지지 않았던 상처와 고통,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마음과 실천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겪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매주 수요일 평화로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용기였고 힘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김복동님은 일제 식민지 시기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의 전장에서 일본군‘위안부’로 모진 피해를 입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힘든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1992년, 오랜 침묵 끝에 피해자 신고를 한 김복동님은 이후 유엔 등 국제 사회 곳곳에서 일본군성노예제의 진실을 알리며 전시 성폭력을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인식시키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를 필두로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해 증언했고, 2012년부터는 유엔,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지로 해외캠페인을 다니며 정의로운 외침을 이어갔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수요시위에 함께 하셨고, ‘2015 한일합의’를 반대하며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해 외교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일본 우익과 오사카 시장의 망언에 분노하시며 직접 오사카시를 방문해 “증거가 살아있는데 증거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며 호통 치기도 했습니다.
201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자신과 같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겠다는 평소의 의지를 <나비기금>으로 실현시켰습니다. 나비기금은 베트남, 콩고, 우간다, 팔레스타인 등지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 아이들에게 날아가 삶의 의지와 생존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해자들에게는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고 베트남 전쟁 시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하셨습니다.
김복동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많은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약자들의 존엄과 인권 보호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아낌없이 후원하셨고, 한국과 일본의 자연재해 피해자들,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과 노동자들, 세계 곳곳의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지원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우리의 여정이 구조적 폭력과 차별에 맞서는 수많은 이들의 정의와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바람은 김복동 평화인권상이 되어 청년 세대 활동가들과 학생들의 장학금이 되었습니다. 김복동 연구지원사업이 되어 새로운 자료발굴과 분석의 마중물이 되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기록과 정리, 기억의 전승을 위한 아카이브 구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의 끈질긴 투쟁으로 마침내 작년 11월, 대한민국 고등법원은 일본국의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명했습니다. 김복동은 사랑이고 뿌리 깊은 나무이며 연대이자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김복동 할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일본 정부와 극우 역사부정 세력이 일본군성노예제의 진실을 부정하며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한국 정부가 굴종적 자세로 가해자의 편에 서서 역사정의를 훼손하고 있는 오늘날,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수요시위에서 일본대사관을 향해 호령치던 그 단단하고 우렁찬 목소리, 환하게 웃으며 대학생들의 손을 힘 있게 잡던 모습. 그런 할머니를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서럽기만 합니다.
외롭고 힘들고 상처 입을 때마다, 길을 잃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하소연하고 의지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에 계시다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견디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싸워달라”라는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여성인권·평화를 위해 더 큰 길을 열어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김복동의 용기와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김복동을 기억하는 수많은 양심적인 국내외 시민들이 함께해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2024년 1월 24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_황선진 전 평화나비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2017년도부터 2019년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동아리 평화나비에서 활동했던 황선진이라고 합니다.
평화로에서 정말 평화로운 수요시위가 열렸던 시기,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시위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요시위에 뜸하게 찾아오게 되었는데, 오늘은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곧 다가올 고 김복동 할머니의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평화나비 활동을 하던 시기 내내, 고 김복동 할머니는 제게 있어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 그리고 인권운동가이셨습니다. 종종 수요시위에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는 꼭 앞자리에 앉아 할
머니를 뵙고 싶어했습니다. 발언하시는 모습을 보면 꼭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들기도 했습니다. 화해치유재단 1인 릴레이 시위 때도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할머니께서 시위에 참여하셨다는 소식을 보며, 내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하는 다짐을 새로이 새기곤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화나비 옆에,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을 하는 모든 이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어주실 것만 같았던 할머니의 부고 소식은 저에게 꽤나 힘든 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발언문을 쓰기 위해 제가 평화나비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 김복동 할머니 생전의 모습을 많이 찾아보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꾸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찾아뵐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많이 찾아뵐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할머니는 제 마음 속에서 그립고 뵙고 싶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신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평화나비 활동을 마친 이후 현재 대학생기후행동이라는,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한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은 언뜻 보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결국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께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 재일조선학교 학생들 등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많은 곳들과 연대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기후위기 문제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 김복동 할머니께 하고 싶은 말을 이 자리에서 늦게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김복동 할머니, 할머니를 보며 활동해왔던 저는 여전히 다른 자리에서, 꿋꿋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할머니는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유이자,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동을 지속할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추구하셨던 평화의 가치를 이어 받아, 저는 언제까지나 평화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는 평온하실 수 있도록, 이 문제의 해
결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힘쓰겠습니다. 활동가가 되어주셔서, 그리고 그 덕에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언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_송원근 영화 <김복동> 감독
<기억하고 새기는 첫걸음 “그 이름을 부를 때”>
안녕하세요.
저는 2019년 김복동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하고,
영화를 제작하던 시간을 ‘그 이름을 부를 때’라는 책으로 출간한 바 있는
뉴스타파 송원근 피디입니다.
영화 김복동을 제작하고, 또 취재를 하면서
늘 바라만 보던 수요시위 단상에
제가 이렇게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할머니의 5주기를 앞두고 있는만큼,
제가 느낀 이야기를 짤막하게나마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중에 영화 김복동을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마지막에 내레이션을 한 한지민 배우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이는 아흔넷, 이름은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이름을 가슴에 새겨 남기는 것은
그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은
영화를 제작하는 일년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김복동을 제작할 때도
그 제작 에세이를 책으로 쓸 때도
사람들이 김복동 할머니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첫걸음은,
이름을 부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를 떠나보냈던 5년 전도, 오늘처럼 이렇게 추웠습니다.
오늘처럼 하늘이 무척 파랬고, 겨울 공기는 무척이나 매서웠습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
이 겨울 날씨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진 듯합니다.
일본 정부는 역사를 지우려고 하고 있고
우리 정부는 이제는 덮자고 합니다.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시위는
이제 이렇게 소녀상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씁쓸합니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기에
우리는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더 기억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세상의 더 많은 피해자를 위해 노력하고 싸웠던 모습.
자신이 피해자였기에
스스로 당당하게, 일본정부를 향해 꾸짖고 사죄하라고 외치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래서 더 그립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김복동 할머니가 남긴 희망의 씨앗은 곳곳에 뿌려져 그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이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도 할머니를 기억하고,
어렵고 힘들 때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할머니가 건넨 장학금으로 어렵게 공부를 했던 학생들은,
할머니와 만난 그날의 기억과
할머니의 말씀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상징하는 목련꽃만 봐도 할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손을 잡아주며,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깊이깊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 역시 일본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희망의 씨앗들이,
일본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곳곳, 할머니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의 씨앗들이 무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이름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여러분이 직접 그 희망의 씨앗이 되어
기억하고 새기는 데 앞장서주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김태중 민애청 사무국장
김복동 할머님을 기억합니다. 할머님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장소가 외교부 앞입니다. 수술 후 퇴원한지 얼마 되지않은 몸을 이끌고 외교부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 1인시위를 하시는데, 하필 그날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할머님과 많은 시민들의 투쟁으로 재단은 해체 되었지만 10억엔은 그대로고 한일위안부합의도 공식합의라는 도장을 받으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지금 외교부와 국방부를 보더라도 화딱지가 납니다. 외교부 2차장으로 매국적 한일위안부합의의 주역인 주제에 합의 후 감히 나눔의집을 찾아가 “ 이 이상의 명예 회복은 있기가 힘들다”느니, "코끼리의 다리 하나만을 보지 마시고 전체를 들여다보고 의미를 평가해 달라"느니하는 망언으로 할머니들을 가르치려 했던 조태열.
강제동원 재판도 양승태 대법원과 재판거래를 공모하며 ‘강제동원 재판이 한일관계를 훼손한다’느니하는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하고, 법원행정처 직원과 김앤장을 수차례 만나 재판을 모의한 조태열. 5년을 끌어 결국 이춘식 할아버지 외에 다른 분들은 역사적 승리도 직접 못보게한 역사의 죄인 조태열. 이제는 강제동원 3자 변제안이 훌륭한 안이라며 칭송하더니 결국 외교부 장관이 되는 나라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국방부 정신전력 교재에서 독도는 영토분쟁 지역으로 규정하고 지도에서 지우고, 역사문제는 없는 일 만들고 한일협력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국방부. 강제동원 3자변제 안은 한일 관계 해법이라는 국방부 장관 신원식. 이런 자들을 차마 가만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외교부든 국방부든 이렇게 한일과거사 문제를 무슨 짐짝 취급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한일 관계 복원이란 바로 한미일군사동맹입니다. 지난 1월 15일부터 사흘간 제주 남방에서 ‘떠다니는 군사기지’ 미국 항공모함과 함께 한미일해상훈련이 진행됐습니다. 북측을 겨냥한 이 훈련에 이미 모두 예상했듯 북측은 대응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한미일군사동맹에 기반해 북한 정권 붕괴, 선제타격, 지휘부 참수작전이 진행된 결과가 지금의 위기의 한반도 현실을 가져왔습니다.
적대가 적대를 부르는 상황이 한반도 평화를 훼손하는 동안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전쟁벨트를 완성하고, 욱일기를 단 일본은 군사대국화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대국의 등쌀에 우리 민족의 권리와 평화가 짓밟혔던 100년 전과 닮아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원합니다 . 저들이 끝내 잘못을 반복한다면 할머니들이 그랬듯, 함께했던 시민들이 그러했는 청년들도 뚜벅뚜벅 싸워 나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김복동 할머님을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대발언_박태훈 청년진보당 집행위원장
바로 오늘,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제 피해자들을 “매춘부”라고 이야기했던 류석춘 전 교수가 1심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아홉 분의 피해자가 살아서 피해를 증언하고 있는데,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와 고통을 무시한 판결입니다. 일본 정부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한 류 교수의 발언을 재판부가 용납해선 안 됐습니다. 이번 판결은 학문의 자유를 지킨 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악랄한 2차 가해에 동참하고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작년 11월 이미 우리 사법부는 일본의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확인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해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건 단순히 “통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 스스로 정당성을 무너뜨린 판결입니다. 류석춘을 비롯해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2차 가해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불행해집니다. 강성희 의원 하나는 막을 수 있었겠지만,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일관되게 친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사법농단의 실행자, 강제 동원 재판거래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 인사가 외교부 장관이 되어 “한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나라의 영토를 지켜야할 국방부의 교육자료에는 독도가 빠져있었습니다. 후쿠시마에서 핵폐기물을 바다에 흘려보내는 데,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에 안전하다고 보증을 서주고 있습니다. 기시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한마디도 못하는 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습니까? 한일 간의 올바른 미래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정의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가능합니다.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5주기입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이땅의 평화를 바라셨던 할머님을 따라. 진보당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고, 정의로운 역사를 바로잡는 길에 앞장서겠습니다.
연대발언_이혜성 진보대학생넷 회원
안녕하세요. 진보대학생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공회대 이혜성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학생넷 회원으로 또 역사동아리 사다리 회원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했었는데요.
이번 수요시위는 김복동 할머님의 뜻을 기억하는 추모 주간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 의미가 더욱 깊은 수요시위라고 생각합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수요시위에 참석하시고 암 투병 중에도 위안부 피해자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정부의 대응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1인 시위를 이어 나가셨던 김복동 할머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잡고 살아”라고 하셨던 할머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할머님의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범죄에 대한 사죄와 피해에 대한 배상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일조차 관심을 갖지 않고 외면한다면 다시 싸워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화해치유재단처럼 현 정부에서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안과 독도 문제를 포함한 지속되는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를 보며 이러한 현실이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제가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는, 또 수많은 분들이 수요시위와 함께 연대하는 이유는 이렇게 잘못에 대한 사죄라는 당연해야 하는 일들이 정말 당연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가장 참혹한 순간을 몸소 겪어오신 김복동 할머님은 ‘전쟁 없는 세상’,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일본의 사죄와 정당한 배상과 함께 앞으로의 전쟁범죄를 막기 위해 평화를 외치시며 다른 피해자들을 돕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정당화해도 전쟁중인 나라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참혹한 일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제대로된 사죄와 배상을 하는 그날까지, 이 땅에 전쟁이 멈추고 평화가 깃드는 그날까지, 김복동 할머님께서 임종의 순간에도 외치셨던 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저희가 함께 외치고, 기억하고, 알리겠습니다.
구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