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전시성폭력재발방지나비기금, 우간다로 날다! 3일차

우간다 굴루에서의 일정 마지막 날인 2월 24일 일요일, 정의연 활동가들은 나비기금 수혜단체인 골든위민비전에서 생존자들을 만나고, 제1회 김복동평화상 수상자인 아찬 실비아 골든위민비전 대표님이 수상금으로 장학금을 전달한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정의연 활동가들을 보고 다들 환호와 노래 공연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생존자들이 LRA 내전 피해자로서 겪은 고통과 살아 돌아와서 사회의 낙인 때문에 겪은 고통을 소개하는 연극 공연도 준비해주셨습니다.

작년 8월 아찬 실비아 대표님께 수여된 제1회 김복동평화상 수상금은 2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되었습니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가지 못 했던 학생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하시는 모습을 김복동 할머니께서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잠시 생각했습니다. 정의연 활동가들은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말씀이 담긴 팔찌, <25년간의 수요일> 영문판, 작은 소녀상을 학생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골든위민비전에는 총 5개의 지역모임이 있으며, 청소년 모임은 1개로 골든위민비전 사무실에서 다 같이 모인다고 합니다. 청소년 모임을 통해 감금 중 태어나거나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이 함께 모여 놀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고 하네요. 정의연 활동가들이 방문한 골든위민비전은 여섯 개의 모임을 연결해주고, 총 200여 명이 넘는 회원들을 지원하는 본부 같은 느낌입니다. 경찰에 LRA 반군으로부터 탈출한 생존자나 가정폭력에 대한 신고가 들어오면 골든위민비전에서 상담을 하고, 골든위민비전은 환자들은 지역 병원에 연계해 치료와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회원 3/4 정도가 HIV/AIDS 환자이고, 정부에서 약을 무료로 제공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먹지도 못 하는 생존자들은 약을 먹어도 치료를 이어나가기 버거운 상태입니다.

골든위민비전은 아촐리족 왕의 사유지에 있는 건물을 무료로 임대하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존자들과 아이들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맞으며 모임을 하는 걸 보고 아촐리족 왕이 공간을 제공했고, 비가 새지 말라고 지붕을 얹었습니다. 하지만 비싼 전기세 때문에 콘센트 하나를 사용하지 않고, 벽에는 금이 가는 등 보수가 필요합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생존자들이 만든 비즈와 가방, 아찬 실비아 대표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정의연에서 전달한 작은 소녀상과 김복동 할머니의 미소가 새겨진 제1회 김복동평화상 상패가 저희를 맞아주었습니다. 아찬 실비아 대표님은 김복동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파 며칠이고 울었다며, 소중한 사람을 추모하는 아촐리족 문화에 따라 김복동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2018년 기림일 때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뵈었을 때 희망을 갖고 살라고 응원해주시고, 따뜻하게 포옹해주신게 기억난다며, 함께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진행된 생존자 인터뷰는 골든위민비전의 Samuel 씨와 아찬 실비아(Acan Sylvia) 대표님이 통역해주셨습니다.

-아니노 마가렛(Aneno Margaret): 1993년 3월 4시쯤 초등학교 3학년(11살)이었던 마가렛 씨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납치되어 11년 만인 2004년, 22살 때 돌아왔습니다. 마가렛 씨는 LRA 반군에 의해 우간다에서 남수단까지 1주일 만에 이동하면서 낮에는 반군이 마을에서 훔친 식량 등을 옮기고, 밤에는 성노예로 지내야 했습니다. 수단에 도착해서는 하루밤 자고 다음 날 총을 받은 후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는 LRA 반군과 정부군 간의 전투 중 총에 맞아 왼팔을 잃었고, 가슴에도 총상이 남았습니다. 남수단에서 우간다 정부군을 통해 비행기를 타고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 2명과 함께 돌아왔고, Gusco 재활센터에서 6개월 간 있다가 골든위민비전의 아찬 실비아 대표님을 만나 상담을 받아, 골든위민비전가 함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의 경우 가족과 다시 살 수 있었고, 새로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 남편이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을 싫어하고 가정폭력을 저질러 현재 총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며, 집세도 내고 생계도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골든위민비전에서는 왼팔이 없기 때문에 골든위민비전에서 비즈 공예를 하는 대신 거리에서 바나나를 팔러 다닙니다. 또한, 마가렛 씨는 아직도 총상으로 인한 가슴 통증도 심하게 겪고 있습니다. 마가렛 씨는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쉼터와 아이들을 위한 학비 지원이 가장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 자신들의 권리를 알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배상에 대해서는 우간다 정부군, 우간다 경찰, LRA군 중 누가 팔을 쐈는지 모르겠으나, 생존자들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배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라녜로 그레이스 (Lanyero Grace): 사무실 밖에 아이들과 함께 있던 그레이스 씨를 만났습니다. 그레이스 씨 품에 안긴 막내는 3살인데 영양실조로 제대로 걷지도, 말을 하지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가 막내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고,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2000년, 15살이었던 그레이스 씨는 밤에 집에서 자던 중에 동네의 다른 여성 2명과 납치되었습니다. 이후 LRA 반군이 훔친 식량 등 무거운 짐을 옮기며 먼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감금 중에 함께 있었던 여성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성폭행을 당했고, 그레이스 씨는 집단성폭행을 당했습니다. 2006년 우간다 정부군과 LRA 반군 사이 전투가 있었을 때 정부군이 그레이스 씨를 구출하여 아이를 임신 한 상태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그레이스 씨를 데리러 와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새 남편을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LRA 반군 피해를 입지 않았던 남편에게 피해사실을 숨기고 결혼했으나, 이를 알게 된 남편이 5명의 아이들과 그레이스 씨를 두고 수단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남편도 떠나고, 남편의 부모도 남편과 그레이스 씨 사이의 막내 딸이 장애를 가진 걸 알고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웃집을 전전하면서 살다 골든위민비전에 쉼터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아이들 5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학교에 다니지 못 하고 있고, 12살 첫 째는 학비를 낼 수 없어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첫 째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찬 실비아 대표님이 학교장님과 대화하는 노력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이웃집에서 팬케이크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장사를 하지만, 집세(10,000우간다실링/월)를 내거나 생계를 이어나가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골든위민비전에서 무료 배식을 할 때 먹고, 집에서는 음식이 없어 굶는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생존자들은 큰 쥐를 잡아먹는데, 쥐를 잡으려고 불을 질렀다가 집이 타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레이스 씨는 아이들이 굶지 않도록 여성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쉼터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레이스 씨가 잠시 지낸 임시쉼터는 파파야 나무로 만들어져 비가 다 새는 둥 환경이 열악하였기에 학교에 가지 못 하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쉼터가 절실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레이스 씨는 한국사람들에게 여성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리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레이스 씨는 LRA반군과 우간다 정부 같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LRA반군이 아니었다면 그레이스 씨가 고향을 떠날 일도 없었고, 이 때 정부군은 전혀 피해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고요. LRA반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사람들은 언제 LRA반군들이 다시 찾아올까 두려움 속에 산다고 합니다.

-아넥 에블린 (Anek Evelyn): 1991년 9살 때 납치된 에블린 씨는 LRA반군에 의해 왼쪽 귀가 잘리는 고문을 받고, 2003년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뢰를 밟아 왼발이 잘렸습니다. LRA반군은 마을에서 훔친 음식들을 담은 무거운 짐을 옮기며 먼 거리를 이동하게 했습니다. 감금 중이던 16살에 첫 아이를 낳았고, 총 세 명의 아이들과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은 LRA 반군이라며 쫓아냈습니다. 새 남편은 한 쪽 다리가 없다고 에블린 씨를 학대하고,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을 쫓아내려 하고, 결국 떠나갔다가, 에블린 씨가 나비기금으로 의족을 구해 두 발로 걷게 되니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에블린 씨는 아이들과 함께 오두막을 임대하여 살고 있지만, 집주인마저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은 LRA반군이라고 쫓아내려 한답니다.

에블린 씨는 사람들이 에블린 씨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삶이 힘들고 살 이유가 갈수록 찾기 힘들지만, 골든위민비전에서 심리지원을 받거나 아이들을 볼 때면 조금 더 나아진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에블린 씨는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쉼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학비가 가장 필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장학금이 생기면 아이들도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김복동할머니께서 "다시는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된다" 라고 하신 것처럼, 에블린 씨도 "그 누구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 안 되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아치로 로즈 (Aciro Rose): 1992년 10월 9살이었던 로즈 씨는 해 뜰 무렵 굴루시내에서 20분 거리인 알라갈룸 플라자에서 엄마와 형제,자매들과 있던 중 납치되었습니다. 이 때 형제 2명과 자매 1명과 함께 납치되었는데 모두 LRA 반군에 의해 죽고 로즈 씨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LRA 반군은 처음에는 로즈 씨에게 길 안내를 시켰는데, 로즈 씨가 모른다고 하면 뺨을 수 차례 때렸다고 합니다. 또한 마을에서 닭을 훔치면 닭을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후 LRA 반군은 어린아이였던 로즈 씨가 리더에게 적합하다고 하며 끌고 갔습니다. 로즈 씨가 거부하자 Joseph Kony 는 100대를 때리라고 명령했고, 다 맞은 로즈 씨는 그의 방으로 끌려갔지만, 너무 지쳐있어 다시 끌려나왔습니다. 이후 로즈 씨는 LRA 반군 리더인 Joseph Kony 의 50명의 '아내' 중 1명이 되었는데요, 밤에는 성폭행을 당하고 낮에는 반군의 짐, 무거운 총, 그리고 감금 중에 낳은 아기를 모두 업고 하염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수단에 갔을 때는 다른 무장단체인 Dinkers의 위협 때문에 LRA 반군의 감시는 더욱 험해졌고, 그룹에서 한 명이 사라지면 그룹 전체가 맞아야 했습니다. 감금 중에 낳은 3명의 아이들(지금은 첫째 17살, 둘째 13살, 셋째 12살)과 돌아 온 로즈 씨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 이제 총 5명의 아이들을 키웁니다.

피해자 쉼터였던 Gusco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심리지원도 받지 못 하였고, 집에 돌아가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친척들은 로즈 씨 아버지의 땅을 독차지하기 위해 로즈 씨가 반군들을 불러들일거라며 쫓아냈다고 합니다. 새 남편도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오는데, 어디 다녀왔냐고 물으면 때리는 등 가정폭력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로즈 씨는 골든위민비전에서 비즈를 만들거나, 물을 거리에서 팔거나, 이웃집에서 설거지나 빨래를 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집세(20,000우간다실링/월)를 내고 아이들의 병원비나 학비를 대기에는 많이 힘듭니다. Gusco에서 로즈 씨는 적극적으로 기술을 배웠고, 골든위민비전에서는 트라우마를 견디기 위한 심리지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로즈 씨는 골든위민비전에서 만난 생존자들과의 모임 덕분에 자살에 대한 생각을 이겨내었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즈 씨는 골든위민비전에 전달되는 나비기금이 생존자들에게 큰 희망이 된다며, 앞으로도 골든위민비전과 실비아 대표님에 대한 지지를 부탁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돕겠다면서, 한국사람들에게도 우간다에 가족이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든 방문하라고 합니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나라를 바꿀 수 있도록 학비에 대한 지원도 부탁했습니다.

-Acan Evelyn (아찬 에블린): 1995년 11살 때 끌려간 에블린 씨는 나이가 많은 반군 지휘관에게 배정되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반군의 짐을 옭기거나 요리 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반군이 판단하기에 성적으로 성숙되었다고 생각했던 나이가 되자, 지휘관의 '부인' 중 한 명이 되어 성노예로의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2004년 우간다 정부군과 LRA 반군 사이의 전투 때 혼절 상태에서 구출되어 돌아온 에블린 씨는 다리의 총상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기 위해 병원에 있을 때 라디오 방송도 하였으나, 친척들이 찾아와서 다리가 나으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퇴원 후 감금 중에 낳은 Amone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으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친척들은 우간다 정부가 지은 난민캠프에 있었으며, 이후에는 아이가 자라면 땅을 뺏길까봐 쫓아냈다고 합니다. 또한 LRA반군에 의한 납치피해자이고 '남편'이었던 반군 지휘관이 돌아와 아찬 에블린 씨와 감금 중에 낳은 아이 Amone를 함께 돌보겠다고 하였으나, 아찬 에블린 씨가 다리를 다친 걸 알고 같이 있기 싫다며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찬 에블린 씨는 돌아와서 새 남편이 두 명 있었는데요, 첫 남편은 감금 중에 낳은 Amone를 싫어하고 쫓아내려고 했으며, 두 번째 남편은 아찬 에블린 씨가 LRA 반군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임신한 아찬 에블린 씨를 버리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후 오두막을 빌렸으나, 음식도 제대로 먹기 힘들고 집주인이 쫓아내려 하여 골든위민비전에서 도와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골든위민비전에서 재봉 기술을 배워 기린 인형도 만들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쉼터가 절실합니다. 그래서 아찬 에블린 씨는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위한 학비와 쉼터에 대한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우간다 정부에서는 내전 피해자들을 보호하지도, 관심을 갖거나 지원을 해주지도 않으니, 다른 나라 정부에서라도 우간다 내전 문제를 제기해 우간다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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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에는 골든위민비전에서 선물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생존자들이 직접 만든 비즈 공예는 종이 달력을 오려서 말은 다음, 불에 구워서 비즈로 만든 것으로, 목걸이 하나를 만드는데 2주가 걸린다고 합니다. 골든위민비전 활동가들과 기념사진을 마치고 아찬 실비아 대표님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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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내전은 20년 간 이어지면서 북부 우간다 지역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붕괴된 사회 구조와 침해된 인권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LRA 반군에게서 살아돌아와도 다시 가난과 폭력, 차별 속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아찬 에블린 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같이 LRA 반군에 의해 납치된 피해자라도 남성은 반군 지휘관이 되거나 돌아와서 우간다 정부군에 모집되어 직업군인이 되지만, 여성은 성노예로 지내다가 돌아와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생존을 위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곤 합니다. 이렇듯 여성 피해자들은 다시 성폭력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우간다 정부나 국제인권단체들이 세운 난민캠프에 있던 사람들은 LRA 반군의 납치는 피했으나, 여성들은 캠프 안에서 시민이나 다른 난민에게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관계를 일찍 시작하여 사회로 돌아와서는 다른 일을 구하지 못 하고 성매매 피해를 겪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절망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경제적 지원,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 우간다 정부와 LRA 반군에 대한 처벌과 책임이행에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일본군성노예 피해를 입고 겨우 한국으로 돌아와, 냉담한 한국 사회에서 다시 살아남으셨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과 닮았습니다. 여러분이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손을 잡았을 때 처럼, 우간다 LRA내전 피해자들도 여러분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나비기금 후원계좌 : 국민 069137-04-018141

*우간다 생존자들이 제작한 가방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개 당 1만원으로 한정판매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