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루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정의연 활동가들은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내전에 의해 소년병, 소녀병 피해를 입은 시민들, 밤에 납치될까 두려워 밤마다 시내 버스정류장과 병원 지하에서 잠을 청하는 아이들(night commuters)을 조명하며 LRA 내전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린 <Invisible Children> 과 LRA 성노예 생존자 Grace 씨의 이야기를 담은 <Grace>를 시청하였습니다.
우간다 내전 중 일어난 인권침해와 전쟁범죄는 그 규모에 비해 국제사회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Invisible Children>과 같은 영화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우간다 내전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반군 리더 Joseph Kony의 처벌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웬드아프리카 사무실을 방문하였습니다. 웬드아프리카는 LRA 성노예 생존자 21명이 재봉사로 고용하여, 생존자들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고 수제작한 가방을 판매하여 생존자의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사무실 입구부터 생존자들이 제작한 다양한 가방과 장난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웬드아프리카에서 운영하는 저축조합인 (Village Savings and Loans Association, VSLA)에 대한 설명을 총무 Catherine 씨와 Invisible Children 및 웬드아프리카 활동가 Comfort 씨에게서 들었습니다. 우간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높은 이자가 붙기 때문에, 웬드아프리카 회원들은 저축조합을 통해 1) 저축(2주에 한 번씩 저축하여 1년 뒤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음), 2) 복지(빌려주고, 이자를 회원들끼리 나눠 가짐), 3) 사회복지(장례비, 병원비 등 긴급지원) 활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회원마다 장부가 있고, 입출금 내역을 꼼꼼히 기록해둠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저축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고 합니다. 생존자들이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는 1) 가족이 아픈 경우, 2) 자녀들 학비, 3) 사업 운영이라고 합니다.
저축조합에 3개월 동안 참여하면, 개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창업 훈련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창업 훈련을 받은 생존자들은 바나나 장사, 비즈 장사, 가방 장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간다고 합니다.
웬드아프리카로 전해진 나비기금은 이러한 저축조합 훈련에도 쓰이고 있어 생존자들이 지지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이후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는 웬드아프리카의 Comfort 씨가 통역해주셨습니다.
Anena Grace
Adok Agnes
Laker Lucy
마가렛 씨의 집
Margaret
-아니나 그레이스 (Anena Grace, 32세): 영화 <Grace>의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2002년 13살이었던 그레이스 씨는 밤 11시경 집에서 자던 중에 납치되어 9개월이 지난 후에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LRA 지휘관의 다른 아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2004년 LRA와 정부군의 전투 중 아이를 업고 도망가는데 정부군이 던진 폭탄에 아이가 맞았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아이가 죽은 줄도 모르고 뛰다가, LRA 지휘관이 아이를 떼어주고, 4일 연속으로 피가 나던 그레이스 씨를 치료해주었다고 합니다. 충격으로 5일 동안 손이 마비되고, 시력도 나빠지고, 몸을 일으켜 세우기 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약 5개월 정도 후에 낫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상처와 가슴의 통증은 남아있다고 합니다. 2005년 탈출하여 Gusco 재활센터에 들어간 그레이스 씨는 임신을 하고, 탈출할 때 생긴 총상으로 인해 목발도 짚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니 납치되지 않았던 친구들은 자신과 다르게 학교에 다니고 있고, 자신이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살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죽은 아이의 엄마였던 또 다른 LRA 성노예 피해자는 아이 대신 그레이스 씨가 죽었어야 했다며 비난하였고, '남편'이었던 LRA 지휘관의 가족이 찾아오기도 하여 그레이스 씨는 찾아올 바엔 아이를 데려가라며 싸우는 둥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재활센터에서 지내던 중 Invisible Children 제작자들과 만나게 되어, 다리 수술도 받게 되고 학교를 다닐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Apwoyorwot,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로 지었습니다. 그레이스 씨는 자신을 구박했던 또 다른 LRA 성노예 피해자인 아이 엄마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라는 걸 인정하고 용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LRA 반군에 대한 법적 처벌과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 한 정부군의 배상이 이뤄졌으면 좋겠으나, 가해자가 대부분 죽고 납치된 아이들이 가해자로 떠밀어진 상황에서 배상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심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스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 같이 어린 나이에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들(child mothers)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아독 아그니스 (Adok Agnes, 36세): 아그니스 씨는 1995년 12세 때 납치되어 2011년에 돌아왔습니다. 14세 때 25세 반군 지휘관에게 골라졌고, 거절하면 죽임을 당하기에 죽기 싫어서, 혹시 그와 있다보면 탈출할 기회가 생길까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children born from captivity)는 6명 입니다. 2011년 돌아오니 부모님은 이미 LRA에 의해 돌아가셨고, 함께 끌려갔던 친척 4명 중 2명은 죽어서 그 친척 가족이 아그니스 씨에게 왜 자신의 자식이 대신 죽어야 했냐며 비난했다고 합니다. 이에 Gusco 재활센터에서 머물며 재봉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후 이모네 집으로 갔으나, 이모부가 폭력적으로 굴어 빠져나와 다른 단체에서 머물다 웬드아프리카를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돌아왔을 때는 너무 말라서 이웃들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라며 수근대기도 하여 자살 생각을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은 여성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LRA 반군 리더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황이지만, 반드시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정부의 경우 자녀들을 위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LRA 내전의 역사와 피해를 가르쳐야 아이들이 폭력이 아닌 바른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더 나은 미래를 누릴 수 있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아그니스 씨의 아이들은 감금 중에 LRA의 잔인한 폭력을 보고 자랐기에 사람을 보면 도망가고 숨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점차 나아졌으나 아직 트라우마 치료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그니스 씨의 '남편'이었던 반군 지휘관은 수단에서 다른 아내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감금 중에 생긴 '아내'와 돌아오더라도, '남편' 가족 측에서 거부하는 등 LRA 납치 피해자 사이에도 남녀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레이커 루시 (Laker Lucy): 1993년 14세 때 끌려 간 루시 씨는 2000년이 되어서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끌려가서 남수단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물도,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 해 오줌을 마시며 생존했다고 합니다. 65세 LRA 2등 지휘관의 34명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었는데, 그가 머리에 총을 겨눈 채로 성폭행을 하였고, 이후 에이즈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 '남편'이 사망하자, LRA 반군 리더 Joseph Kony가 2등 지휘관의 아이가 없는 어린 '아내'들을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를 틈타 다른 '아내'들과 탈출을 시도하는데, 한 번은 LRA 반군에게 붙잡혔으나 이미 에이즈에 걸렸고, 도저히 아이들을 살릴 방법이 없다고 사정하여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후 수단 군인 5명과 동행하며 도망치는데, LRA 트럭이 뒤쫓아와 숨기도 하고, 군인과 부부인 척하고 아이가 아프다고 하여 빠져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수단 군인이 비행기로 우간다로 이송되는 걸 돕고, 북수단 대통령이 북수단에 남길 권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수단 내 UN캠프에서 우간다로 돌아갈 수 있을만큼 회복했다고 합니다. (당시 LRA 반군 리더 Joseph Kony는 수단 정부에게 우간다에서 학대 받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수단 정부에서는 피해자들이 우간다로 돌아가는 걸 위험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후 Gusco 재활센터에서 지내다 에이즈 검사를 받게 되는데, 양성이라는 결과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곁에서 위로해주셨고, 2006년부터 ARV를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루시 씨는 납치되어 소년병/소녀병으로 싸우도록 떠밀려진 LRA 보다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정부 캠프 바로 옆에서도 시민들은 LRA 반군에 의해 납치되엇다고요. 이에 정부가 제대로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돌아왔을 때 지원이 부족하여 자신이 학교로 돌아가거나, 자녀의 학비를 지원받거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는데, 이에 감금 상태에서 돌아 온 피해자들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렛 (Margaret): 마가렛 씨가 사는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흙벽으로 되어있고, 지붕은 지푸라기로 되어있는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방이 따로 없어 천으로 방 구분을 해두었습니다. 화장실은 동네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사용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는 한 달에 8달러 정도의 임대료를 내고 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렛 씨는 1992년 14살 때 납치되어 2002년에 아이 3명과 돌아왔습니다. 납치된 지 3개월 후 탈출 시도를 하였으나, 막대기로 100대를 맞아 기절하고, 함께 탈출을 시도했던 친구는 참수당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우간다에서 수단으로 이동하는 LRA의 총탄을 옮겨야 했습니다. 임신을 하니 일을 안 시키고 수단에 남겨졌습니다. 2002년 지휘관이 못 걷는 아이가 있는 여성들을 풀어주었고, 우간다 정부군이 이들을 데리고 굴루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후 Gusco 재활센터에서 지내던 중 아이가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재봉 기술을 배워 Invisible Children과 웬드아프리카에서 지원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다 납치되었어도, 혼자 살아남으면 자신 때문에 가족이 죽은 거라며 비난하고, 납치된 후 다른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반군을 끌어들였다며 모함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지원단체에서 피부색이 밝은 사람들이 집을 방문하면, 돈을 받은 게 아니냐며 험담을 한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는 재봉 기술로 지원단체와 일하게 되었고, 집을 얻고, 자녀들의 학비를 내고 있습니다. 이에 웬드아프리카에서 운영하는 저축조합이 더 활발해질 수 있도록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또한,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배상은 물론, 자녀들 학비와 피해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 또한 일본정부의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받길 바란다고 연대의 뜻도 전했습니다.
2. 챤 르웨데 페 방문 및 생존자 인터뷰
웬드아프리카 생존자들과의 인터뷰가 길어져서, 예정보다 늦게 챤 르웨데 페를 방문했습니다. 챤 르웨데 페의 여성들은 토요일 저축모임을 마치고 정의연 활동가들을 큰 환호와 노래로 맞아주셨습니다.
챤 르웨데 페는 나비기금을 통해 닭을 사서 회원들끼리 나누어 기르고 다시 판매하여 수익금을 내고, 저축조합 운영을 통해 자녀들의 학비를 내고, 기록용 카메라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그만한 밭을 임대했다고 합니다. 또한, 생존자들이 함께 비즈와 가방을 만들어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제작한 가방을 판매할 시장도 적고, 자녀들의 중고등학교 학비도 대기 힘든 상황이며, 생존자들을 위한 집은 커녕 땅도 구하지 못 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Ajok Poline
Aber Rose
Adong Florence
-아족 폴린 (Ajok Poline): 1995년 13살에 납치되어, 바로 '남편'이 생긴 폴린 씨는 성폭행을 견디기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LRA는 임신한 상태의 폴린 씨를 우간다에서 수단까지 걷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출산을 해도 바로 걸어야 했다고 합니다. 물이 없어 소변을 마시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나무를 자르도록 시켰는데, 자른 나무를 매로 써서 기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납치되어 소년/소녀병으로 살인과 전투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돌아오더라도 가족이 거부하여 시골에서 살 수 없어 시내로 온다고 합니다. 아촐리족 (Acholi, 북우간다 부족) 문화에서는 아이가 아버지와 사는 편이 나은데, 감금 중에 낳은 아이도 돌봐주겠다고 하던 새남편도 아이가 생기면 이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이에 집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성들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만 어렵다고 합니다.
-아동 플로렌스 (Adong Florence): 플로렌스 씨는 아이 3명과 돌아왔는데, 아이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고 합니다. 한 번은 딸이 할머니(플로렌스 씨 어머니)에게 찾아 갔는데, 플로렌스의 형제가 쫓아 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찾아가도 '땅이 없으니 아빠를 찾을 자격도 없다'며 쫓겨 났다고 합니다.
챤 르웨데 페는 회원 모두가 LRA 성노예 생존자인 자생그룹으로, 모임 장소도 동네에 있는 나무 아래나 비가 오면 동네 주민의 집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등 어려움이 많습니다. 모임 중에 비가 와서 정의연 활동가도 함께 건물로 들어갔지만, 전기도 수도도 없는 컴컴한 건물 안에는 회원들 모두가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당당하다. 우리는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렵지 않다.' 라고 입 모아 말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3. 우간다 국회의원과 야당 대표 저녁식사
긴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웬드아프리카 Jolly 대표님이 준비하신 우간다 국회의원과 야당 대표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정의연 활동가가 방문하기 전 주에 우간다 국회에서 우간다 내전 피해자를 보호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결의안이 준비된 과정에 대해 배우고, 일본군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해 미국, 유럽, UN 등 다양한 곳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나누며 우간다 내전 피해자 지원을 한 단 계 더 발전시킬 방법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 나비기금 후원계좌 : 국민 069137-04-018141
*우간다 생존자들이 제작한 가방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개 당 1만원으로 한정판매 중입니다.
굴루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정의연 활동가들은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내전에 의해 소년병, 소녀병 피해를 입은 시민들, 밤에 납치될까 두려워 밤마다 시내 버스정류장과 병원 지하에서 잠을 청하는 아이들(night commuters)을 조명하며 LRA 내전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린 <Invisible Children> 과 LRA 성노예 생존자 Grace 씨의 이야기를 담은 <Grace>를 시청하였습니다.
우간다 내전 중 일어난 인권침해와 전쟁범죄는 그 규모에 비해 국제사회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Invisible Children>과 같은 영화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우간다 내전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반군 리더 Joseph Kony의 처벌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웬드아프리카 사무실을 방문하였습니다. 웬드아프리카는 LRA 성노예 생존자 21명이 재봉사로 고용하여, 생존자들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고 수제작한 가방을 판매하여 생존자의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사무실 입구부터 생존자들이 제작한 다양한 가방과 장난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웬드아프리카에서 운영하는 저축조합인 (Village Savings and Loans Association, VSLA)에 대한 설명을 총무 Catherine 씨와 Invisible Children 및 웬드아프리카 활동가 Comfort 씨에게서 들었습니다. 우간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높은 이자가 붙기 때문에, 웬드아프리카 회원들은 저축조합을 통해 1) 저축(2주에 한 번씩 저축하여 1년 뒤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음), 2) 복지(빌려주고, 이자를 회원들끼리 나눠 가짐), 3) 사회복지(장례비, 병원비 등 긴급지원) 활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회원마다 장부가 있고, 입출금 내역을 꼼꼼히 기록해둠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저축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고 합니다. 생존자들이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는 1) 가족이 아픈 경우, 2) 자녀들 학비, 3) 사업 운영이라고 합니다.
저축조합에 3개월 동안 참여하면, 개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창업 훈련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창업 훈련을 받은 생존자들은 바나나 장사, 비즈 장사, 가방 장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간다고 합니다.
웬드아프리카로 전해진 나비기금은 이러한 저축조합 훈련에도 쓰이고 있어 생존자들이 지지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이후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는 웬드아프리카의 Comfort 씨가 통역해주셨습니다.
-아니나 그레이스 (Anena Grace, 32세): 영화 <Grace>의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2002년 13살이었던 그레이스 씨는 밤 11시경 집에서 자던 중에 납치되어 9개월이 지난 후에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LRA 지휘관의 다른 아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2004년 LRA와 정부군의 전투 중 아이를 업고 도망가는데 정부군이 던진 폭탄에 아이가 맞았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아이가 죽은 줄도 모르고 뛰다가, LRA 지휘관이 아이를 떼어주고, 4일 연속으로 피가 나던 그레이스 씨를 치료해주었다고 합니다. 충격으로 5일 동안 손이 마비되고, 시력도 나빠지고, 몸을 일으켜 세우기 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약 5개월 정도 후에 낫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상처와 가슴의 통증은 남아있다고 합니다. 2005년 탈출하여 Gusco 재활센터에 들어간 그레이스 씨는 임신을 하고, 탈출할 때 생긴 총상으로 인해 목발도 짚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니 납치되지 않았던 친구들은 자신과 다르게 학교에 다니고 있고, 자신이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살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죽은 아이의 엄마였던 또 다른 LRA 성노예 피해자는 아이 대신 그레이스 씨가 죽었어야 했다며 비난하였고, '남편'이었던 LRA 지휘관의 가족이 찾아오기도 하여 그레이스 씨는 찾아올 바엔 아이를 데려가라며 싸우는 둥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재활센터에서 지내던 중 Invisible Children 제작자들과 만나게 되어, 다리 수술도 받게 되고 학교를 다닐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씨는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Apwoyorwot,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로 지었습니다. 그레이스 씨는 자신을 구박했던 또 다른 LRA 성노예 피해자인 아이 엄마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라는 걸 인정하고 용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LRA 반군에 대한 법적 처벌과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 한 정부군의 배상이 이뤄졌으면 좋겠으나, 가해자가 대부분 죽고 납치된 아이들이 가해자로 떠밀어진 상황에서 배상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심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스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 같이 어린 나이에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들(child mothers)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아독 아그니스 (Adok Agnes, 36세): 아그니스 씨는 1995년 12세 때 납치되어 2011년에 돌아왔습니다. 14세 때 25세 반군 지휘관에게 골라졌고, 거절하면 죽임을 당하기에 죽기 싫어서, 혹시 그와 있다보면 탈출할 기회가 생길까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금 중에 낳은 아이들(children born from captivity)는 6명 입니다. 2011년 돌아오니 부모님은 이미 LRA에 의해 돌아가셨고, 함께 끌려갔던 친척 4명 중 2명은 죽어서 그 친척 가족이 아그니스 씨에게 왜 자신의 자식이 대신 죽어야 했냐며 비난했다고 합니다. 이에 Gusco 재활센터에서 머물며 재봉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후 이모네 집으로 갔으나, 이모부가 폭력적으로 굴어 빠져나와 다른 단체에서 머물다 웬드아프리카를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돌아왔을 때는 너무 말라서 이웃들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라며 수근대기도 하여 자살 생각을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은 여성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LRA 반군 리더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황이지만, 반드시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정부의 경우 자녀들을 위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LRA 내전의 역사와 피해를 가르쳐야 아이들이 폭력이 아닌 바른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더 나은 미래를 누릴 수 있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아그니스 씨의 아이들은 감금 중에 LRA의 잔인한 폭력을 보고 자랐기에 사람을 보면 도망가고 숨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점차 나아졌으나 아직 트라우마 치료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그니스 씨의 '남편'이었던 반군 지휘관은 수단에서 다른 아내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감금 중에 생긴 '아내'와 돌아오더라도, '남편' 가족 측에서 거부하는 등 LRA 납치 피해자 사이에도 남녀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레이커 루시 (Laker Lucy): 1993년 14세 때 끌려 간 루시 씨는 2000년이 되어서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끌려가서 남수단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물도,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 해 오줌을 마시며 생존했다고 합니다. 65세 LRA 2등 지휘관의 34명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었는데, 그가 머리에 총을 겨눈 채로 성폭행을 하였고, 이후 에이즈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 '남편'이 사망하자, LRA 반군 리더 Joseph Kony가 2등 지휘관의 아이가 없는 어린 '아내'들을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를 틈타 다른 '아내'들과 탈출을 시도하는데, 한 번은 LRA 반군에게 붙잡혔으나 이미 에이즈에 걸렸고, 도저히 아이들을 살릴 방법이 없다고 사정하여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후 수단 군인 5명과 동행하며 도망치는데, LRA 트럭이 뒤쫓아와 숨기도 하고, 군인과 부부인 척하고 아이가 아프다고 하여 빠져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수단 군인이 비행기로 우간다로 이송되는 걸 돕고, 북수단 대통령이 북수단에 남길 권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수단 내 UN캠프에서 우간다로 돌아갈 수 있을만큼 회복했다고 합니다. (당시 LRA 반군 리더 Joseph Kony는 수단 정부에게 우간다에서 학대 받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수단 정부에서는 피해자들이 우간다로 돌아가는 걸 위험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후 Gusco 재활센터에서 지내다 에이즈 검사를 받게 되는데, 양성이라는 결과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곁에서 위로해주셨고, 2006년부터 ARV를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루시 씨는 납치되어 소년병/소녀병으로 싸우도록 떠밀려진 LRA 보다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정부 캠프 바로 옆에서도 시민들은 LRA 반군에 의해 납치되엇다고요. 이에 정부가 제대로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돌아왔을 때 지원이 부족하여 자신이 학교로 돌아가거나, 자녀의 학비를 지원받거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는데, 이에 감금 상태에서 돌아 온 피해자들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렛 (Margaret): 마가렛 씨가 사는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흙벽으로 되어있고, 지붕은 지푸라기로 되어있는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방이 따로 없어 천으로 방 구분을 해두었습니다. 화장실은 동네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사용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는 한 달에 8달러 정도의 임대료를 내고 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렛 씨는 1992년 14살 때 납치되어 2002년에 아이 3명과 돌아왔습니다. 납치된 지 3개월 후 탈출 시도를 하였으나, 막대기로 100대를 맞아 기절하고, 함께 탈출을 시도했던 친구는 참수당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우간다에서 수단으로 이동하는 LRA의 총탄을 옮겨야 했습니다. 임신을 하니 일을 안 시키고 수단에 남겨졌습니다. 2002년 지휘관이 못 걷는 아이가 있는 여성들을 풀어주었고, 우간다 정부군이 이들을 데리고 굴루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후 Gusco 재활센터에서 지내던 중 아이가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재봉 기술을 배워 Invisible Children과 웬드아프리카에서 지원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다 납치되었어도, 혼자 살아남으면 자신 때문에 가족이 죽은 거라며 비난하고, 납치된 후 다른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반군을 끌어들였다며 모함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지원단체에서 피부색이 밝은 사람들이 집을 방문하면, 돈을 받은 게 아니냐며 험담을 한다고 합니다. 마가렛 씨는 재봉 기술로 지원단체와 일하게 되었고, 집을 얻고, 자녀들의 학비를 내고 있습니다. 이에 웬드아프리카에서 운영하는 저축조합이 더 활발해질 수 있도록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또한,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배상은 물론, 자녀들 학비와 피해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 또한 일본정부의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받길 바란다고 연대의 뜻도 전했습니다.
2. 챤 르웨데 페 방문 및 생존자 인터뷰
웬드아프리카 생존자들과의 인터뷰가 길어져서, 예정보다 늦게 챤 르웨데 페를 방문했습니다. 챤 르웨데 페의 여성들은 토요일 저축모임을 마치고 정의연 활동가들을 큰 환호와 노래로 맞아주셨습니다.
챤 르웨데 페는 나비기금을 통해 닭을 사서 회원들끼리 나누어 기르고 다시 판매하여 수익금을 내고, 저축조합 운영을 통해 자녀들의 학비를 내고, 기록용 카메라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그만한 밭을 임대했다고 합니다. 또한, 생존자들이 함께 비즈와 가방을 만들어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제작한 가방을 판매할 시장도 적고, 자녀들의 중고등학교 학비도 대기 힘든 상황이며, 생존자들을 위한 집은 커녕 땅도 구하지 못 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족 폴린 (Ajok Poline): 1995년 13살에 납치되어, 바로 '남편'이 생긴 폴린 씨는 성폭행을 견디기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LRA는 임신한 상태의 폴린 씨를 우간다에서 수단까지 걷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출산을 해도 바로 걸어야 했다고 합니다.
물이 없어 소변을 마시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나무를 자르도록 시켰는데, 자른 나무를 매로 써서 기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납치되어 소년/소녀병으로 살인과 전투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돌아오더라도 가족이 거부하여 시골에서 살 수 없어 시내로 온다고 합니다. 아촐리족 (Acholi, 북우간다 부족) 문화에서는 아이가 아버지와 사는 편이 나은데, 감금 중에 낳은 아이도 돌봐주겠다고 하던 새남편도 아이가 생기면 이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이에 집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성들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만 어렵다고 합니다.
-아동 플로렌스 (Adong Florence): 플로렌스 씨는 아이 3명과 돌아왔는데, 아이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고 합니다. 한 번은 딸이 할머니(플로렌스 씨 어머니)에게 찾아 갔는데, 플로렌스의 형제가 쫓아 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찾아가도 '땅이 없으니 아빠를 찾을 자격도 없다'며 쫓겨 났다고 합니다.
챤 르웨데 페는 회원 모두가 LRA 성노예 생존자인 자생그룹으로, 모임 장소도 동네에 있는 나무 아래나 비가 오면 동네 주민의 집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등 어려움이 많습니다. 모임 중에 비가 와서 정의연 활동가도 함께 건물로 들어갔지만, 전기도 수도도 없는 컴컴한 건물 안에는 회원들 모두가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당당하다. 우리는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렵지 않다.' 라고 입 모아 말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3. 우간다 국회의원과 야당 대표 저녁식사
긴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웬드아프리카 Jolly 대표님이 준비하신 우간다 국회의원과 야당 대표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정의연 활동가가 방문하기 전 주에 우간다 국회에서 우간다 내전 피해자를 보호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결의안이 준비된 과정에 대해 배우고, 일본군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해 미국, 유럽, UN 등 다양한 곳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나누며 우간다 내전 피해자 지원을 한 단 계 더 발전시킬 방법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 나비기금 후원계좌 : 국민 069137-04-018141
*우간다 생존자들이 제작한 가방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개 당 1만원으로 한정판매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