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전시성폭력재발방지나비기금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 5일

기록: 2019년 나비기금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단 김지연

*하미마을 위령비*

하미 마을에서의 학살에 대해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미군이 먼저 하미 마을에 주둔했었으며 마을 주민들을 전략촌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음식 배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기에 주민들은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미 마을로 돌아왔고 청룡부대가 주민들의 재정착을 도왔습니다.

가끔 청룡부대가 주민들을 모아 연설을 하며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주민들과 한국군의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탄 아주머니의 증언으로 한국군이 주민들을 모으자 어린 동생이 춤을 추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동생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고 동생은 학살로 인해 그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만큼 주민들은 학살이 일어날 것에 대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미 마을에서 총 135명이 희생당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여성들의 중간이름에 Thi를 넣는데 위령비를 보면 정말 다수의 사람들의 이름에서 Thi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번호 133~135 이름을 보면 Vo Danh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968년도에 태어났었는데 학살이 음력 1월 14일에 일어났기에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Vo Danh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아이들을 부르는 ‘무명’ 또는 ‘아무개’라는 뜻입니다. 위령비에는 굉장히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어린아이들이 죽었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졌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는 시신이 온전치 못하면 나쁜 죽음이라 합니다. 하지만 한국군은 학살을 저지르고 아직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을 불도저로 미는 ‘두 번째 학살’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살당한 것도 굉장히 슬픈데 시신을 온전하게 하지도 못하고 뭉개지는 것이 매우 억울하고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지금 하미 마을의 위령비의 비문은 연꽃 비석으로 덮여있습니다. 이 위령비는 한국의 참전군인회에서 제안하고 함께 세우고자 한 것이지만,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의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는 비문을 문제 삼았습니다. 참전군인회를 비롯하여 한국정부, 한국정부와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베트남 정부에서 비문을 없애라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비문을 수정하거나 없애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후대에 한국 사람들이 다시 열어주기를 바란다고 하며 비문 위에 연꽃 비석으로 덮게 되었습니다. 하미 마을 위령비의 비문을 둘러싼 이러한 사건을 두고 1차로 학살을 저지르고, 2차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하고, 이젠 정신까지 말살한 3차 학살이라며 학살로 소중한 가족과 이웃을 잃은 주민들은 억울해하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묵념을 통해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사죄를 하며 꼭 비문을 다시 열 수 있도록 함께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피해자에게 3차 가해를 저지르는 그런 모습이 너무나 화가 나며 억울한 마음이었습니다. 학살을 저지르고 이젠 기억하려는 그 정신까지도 학살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정말 끔찍하고 비극적이었습니다.

*고 팜티호아 할머니댁에서 만난 쯔엉티투 할머니와 럽 아저씨*

먼저 구수정 박사님께서 고 팜티호아 할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후 럽 아저씨와 쯔엉티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쯔엉티투 할머님은 팜티호아 할머니와 정말 친한 사이였고, 학살로 발이 잘리고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학살 그 상황도 끔찍했고 병원 이송 전 상황도 참 잔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야 했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힘듦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쯔엉티투 할머니와 럽 아저씨께서는 평화기행을 온 한국인들을 참으로 예뻐해 주셨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우는 참가자들을 다독여주시고,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에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인사조차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쯔엉티투 할머님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감히 공감한다고 할 수 없었고 눈을 쳐다보고 저의 마음을 전달하기엔 너무나 그 눈이 슬퍼서 아무 말 없이 죄송합니다만 이야기했습니다. 그조차 앞에서 할 수 없어 팜티호아 할머님 묵념할 때 서야 이야기했습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기행단에게 ‘너희가 왜 죄송하다 하느냐,’ ‘아무런 잘못 없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모습에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해서 다시 여기 기행에 참가해 꼭 다시 뵈러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퐁니마을 위령비*

음력 1월 14일 청룡부대 행군 중 부비트랩이 터져 탱크가 뒤집히고 한국군 한 명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분노에 찬 한국군은 근처 마을인 퐁니 퐁넛으로 가 학살을 합니다. 이에 학살 1시간 정도 후에 본 상병 등 미군이 등장해 상황을 확인하고 사진과 기록을 남겼습니다. 30년이 지나고 문서열람이 가능해진 지금, 우리는 사진으로 학살의 현장과 생존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피해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진 속 주민들은 굉장히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학살을 겪어야 했는지 답답했습니다.

구수정 박사님과 함께 일했던 연구자들은 사진 속의 사람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직접 그 당시 베트남으로 무작정 떠나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30년이 지나 기억을 못 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전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잊혀지지 않고 충격이었으면 기억할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득 할머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득 할머님께서 자식을 잃는 고통 그리고 죄책감으로 인해 힘드셨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안타깝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전쟁이 낳은 비극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위령비를 통해 총 74명이 돌아가셨으며 피해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참배를 했는데 마찬가지로 진실을 향해 행동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응우옌티탄 아주머니 만남*

시민평화법정에 등장했던 탄 아주머니를 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트라우마가 컸으나 용기를 내 점점 극복해내고 있으며 문제해결에 있어 활동성이 크신 분인 것에 놀라웠습니다.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미우실 텐데 점점 마음을 열고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본인도 총에 맞아 다친 몸으로도 엄마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그 날 탄 아주머니는 가족을 잃고 오빠랑 둘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 날 학살로 인해 꿈과 가족 등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 그리고 고통받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탄 아주머니를 비롯한 분들이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은 비극이고 또 다른 비극을 낳아 이어집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오길 바라며 여기 기행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남은 기행도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