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전시성폭력재발방지나비기금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 4일

기록: 2019년 나비기금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단 김지한, 강현우, 김광철

1. 붕따오, 토럼 학살 위령비 참배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붕따오, 토럼 학살 위령비를 찾았다. 자칫 방문이 어려울 수도 있었던 일정이지만, 나비기금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틀 전에야 방문허가가 떨어졌다고 한다. 덕분에 기행단이 방문하면서 한국에서 평화의 마음을 모아주신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정의기억연대,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안정선/안수선/안효빈, 제주평화나비/보물섬학교, 충북민예총, 한베평화재단, 호아빈의 리본 조화도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제 방문해 자전거를 전달했던 호아히엡남사 지역 초등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바로 이 학살의 피해 유가족의 직계 가족들이다. 한 번 문이 닫히면 다시 열기가 힘든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졸업여행으로 베트남 평화기행을 선택한 17살 두 친구 지한이, 현우와 나누어 보았다.

지한 : 먼저 위령비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붕따오 마을에서 1966년 1월에 학살이 일어났다. 총 36명이 희생되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나, 위령비로부터 2km 떨어진 토럼 마을에서 42명이 희생되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나고 마을 주민들은 곧바로 한국군 학살의 만행을 고발할 비를 세울 준비를 한다. 마을 주민과 인민위원회가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이 첫 번째는 ‘증오’비였다. 그 증오비엔 한국군의 잔혹 행위가 모두 적혀있었다. 그런데 최근 학살 50주년을 맞아 마을에서 낡은 증오비를 위령비로 바꾸어 세울 것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증오를 넘어선 애도와 추모를 뜻하는 현재의 위령비가 세워졌다.

현우 : 위령비 참배 의식을 마치고 구수정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게 판쭝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작년에 돌아가신 판 쭝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한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집에서 300m 떨어진 물가 수풀 사이에 숨어있다가 학살당하는 친척, 가족을 지켜보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설마 노인인 부모님과, 여성인 아내와, 아이들인 자식들을 죽일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한 채 주먹을 쥔 채로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셨다고 한다. 혼자만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채 정신을 놓다시피 지내다 처음 구수정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구수정 선생님이 할아버지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그리고 가족을 얼마나 잃었는지 물었을 때 나이가 들어 발음이 어눌해진 할아버지는 죽은 가족의 이름을 한 명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마을 사람이 다시 명확한 발음으로 들려주고, 그리고 구수정 선생님이 되묻기를 반복했다. 세 번 이름이 부르는 것이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초혼의식처럼 느껴졌는지 할아버지도, 마을 사람도, 구수정 선생님도 펑펑 우셨다고 한다.

지한 : 하루는 판 쭝 할아버지가 구수정 선생님을 만나는데 그때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시기였다. 베트남 언론에서도 이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구수정 선생님도 낮에는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밤에는 아이들이 구조됐나 오매불망 확인하던 때였다. 판 쭝 할아버지는 대뜸 구수정 선생님에게 “세월호 아이들은 다 돌아왔는감?” 하고 물으셨다. 구수정 선생님은 눈물이 터졌다. “아니요, 못 돌아오고 있어요...” 그때, 거동이 불편해 주저앉아서 짧은 바지를 입고 계셨던 판 쭝 할아버지가 천천히 일어나 주섬주섬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잘 여미고 예를 갖추시곤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베트남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은 알 수 있으니 어느 촌구석 할아버지의 애도의 마음을 꼭 전해주게...”

2. 빈딘성 박물관 탐방

두 번째로 평화기행단이 방문한 곳은 빈딘성 박물관이었다. 이 건물은 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한국군 맹호부대가 한월문화회관으로 지은 곳이다. 해방(통일) 후 이곳은 빈딘성의 자연, 문화, 사람과 고대 참파왕국의 유물들, 베트남의 항불, 항미전쟁 당시 이 지역 베트남 사람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한국군의 빈딘성 내 민간인학살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시된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1965년 빈딘성 전투에서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 미국은 안내인의 표현을 빌리면 ‘더 강한 용병인 악명 높은 남조선 용병’을 데려와 빈딘에 상륙시키게 되고, 그로부터 참혹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민간인학살이 바로 1966년 빈안 학살이었다. 약 한 달간 이루어진 작전 기간 동안 집계된 숫자만 1004명에 이르는 마을 주민들이 수차례에 걸쳐 참혹한 방법으로 집단학살되었다. 이 빈안 지역 외에도 빈딘성 내 여러 지역에서 집단학살이 일어났고 그 방식은 여성의 음부에 죽창을 꽂고, 윤간하고,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죽이는 등 그 방식의 잔혹성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쟁 중 사용된 고엽제에 의한 2차 피해는 2대, 3대까지 이어지고 있고 다시 4대, 5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주민들은 근심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수 많은 사람들, 어린 영웅부터 막대기 하나 들고 미군의 탱크를 돌려세운 할머니, 수 많은 자식들을 전장에 보내야 했던 어머니들까지. 이들의 역사가 담긴 이곳 박물관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지한 : 마을을 지키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차가운 강물에 온몸을 담그고 며칠이고 인간 다리를 놓았던 여성들의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또 불발탄의 화약 잔해와 뇌관을 모아 만든 수류탄들을 몸에 이고, 아군의 퇴로확보를 위해 장갑차를 향해 몸을 던졌던 소년 영웅도 기억에 남는다.

현우 : “베트콩 한 명을 놓치느니 모든 주민을 죽이는게 낫다는 작전을 세운 것 같았습니다.”라고 안내인이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마을에 들어가려면 나를 깔아뭉개고 가라’며 코 앞에 탱크가 다가오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던 할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이곳 문서 보관실에 보관된 정부의 한국군 민간인학살 공식문서도 볼 수 있었는데, 박물관 측의 착오로 그것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아쉽다.

3. 이틀간의 일정정리 소감

현우 : 이번 기행을 하면서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 느낌이다. 전쟁증적박물관이나 그동안의 간담회에서는 이 전쟁의 상대였던 미국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우리가 자행한 가해의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지한 :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참배할 수 없었던 붕따오, 토럼 학살 위령비를 찾을 수 있어 좋았다.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린 것 같아 아쉽다. 우리가 본 베트남 사람들은 어린이, 여성, 노인 할 것 없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다. 이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손톱만큼의 상처만 치유된다고 해도 이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 한국정부도 하루빨리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문제를 자각하고 진정한 해결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베트남과 한국정부 모두 진실을 교육하는데도 힘써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은 계속 관심 갖고 공부하고 기억하고. 이것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우리는 이 기행에 도움을 주시는 현지의 많은 분들께, 그리고 앞으로 만날 생존자, 유가족들에게 베트남어 손글씨로 쓴 이 편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작은 위로가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배우고 기억하겠습니다 - 제주보물섬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