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섬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타시야마(Tashiyama) 할머니(추정 94세)께서 4월 10일 아침 7시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일본의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 전국행동 소속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긴급지원 프로젝트 2021팀’에서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현지 지원단체의 누르씨에 따르면, 타시야마 할머니는 아침에 꽃을 돌보던 중 몸이 좋지 않아 입원하셨고, 이틀 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던 타시야마 할머니. 고통과 아픔 모두 잊으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이하 일본 전국행동 글에서 발췌번역한 타시야마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 타시야마 (남술라웨시주 마카살시 거주)
루우(Luwu) 현 술리(Suli)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술리에는 많은 일본병사가 있었습니다. 분가마리라는 미인 여성을 데리고 항상 말을 타고 이동하던 장교도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막 입학한 13살 때, 술리의 시장에서 잡혔습니다. 5명 정도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병사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저항하자 화를 냈고 무서웠습니다.
뒤에서 몰아세워 저희를 트럭에 태웠어요. 일본군 주둔지에는 막사와 방공호와 긴 집(위안소)이 있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전부 술리의 여성들이었어요.
일본 병사들은 심했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바케로-'라고 말했어요. 패전으로 일본군이 떠났기 때문에 위안소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일본병사의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아직 생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이 사라진 후, 마을은 폭동이나 독립운동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중략) 그 후, 마로스(Maros)의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00명이 시험을 봐서 남자는 7명, 여자는 1명 합격했는데, 그게 저였습니다.
졸업하고 동쪽 루우현 마리리에서 농업지도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술라웨시는 반 수카르노 운동의 거점이라 도시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고, 근처 팔로포에 있던 가족들이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폭동이 무서워 3년 만에 일을 그만두고 마카살에 왔어요. 그 후 결혼을 해서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