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성노예제란?

일본군성노예제란?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군위안소’를 설치하여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해 성노예로 만든 범죄를 말합니다. 일본군성노예제의 피해자들에 대해 명시할 때는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따옴표 안에 넣어 일본군‘위안부’로 표기하였고, 영어로는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로 표현하여 ‘성노예’라는 범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현재는 한국어로도 ‘일본군성노예제’라고 주로 표기하고 있고, 때에 따라 일본군성노예제와 일본군‘위안부’를 적절히 혼용하고 있습니다. 


[ 혼동되기 쉬운 단어 ]

* 종군위안부 : '종군'에는 자발적이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정신대 : 일본의 전시체제 돌입과 함께 조선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한 제도를 말하며, 여성의 경우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피해생존자 황금주 할머니의 어린 시절
피해생존자 황금주 할머니의 어린 시절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

1930년대 초,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간사건이 빈번해지자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군인들이 성병에 걸리는 일이 발생하여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위안소’ 제도를 도입해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였습니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의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연행 당시의 나이가 11세에서 27세에 이르며, 피해자 대다수가 취업 사기, 유괴, 납치 등의 방식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 성노예 징집에 있어 일본육군성의 관여를 드러내는 문서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 성노예 징집에 있어 일본육군성의 관여를 드러내는 문서
일본군 위안소 분포도(출처: WAM)
일본군 위안소 분포도(출처: WAM)

‘군위안소’는 설립·운영·‘위안부’ 모집에 있어 군이 직접 하거나 민간에 위임한 사례, 시기·장소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어느 경우에든 일본군의 보호와 감독, 엄격한 통제를 받았습니다. 각 ‘위안소’의 규정에는 계급별 사용시간, 요금, 성병검진 및 기타 위생사항 등이 명기되어 있었으며, 피해자들은 많은 군인들이 몰려 20-30명이 문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일본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성병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했고 월경, 임신뿐만 아니라 질병에 걸리더라도 무자비하게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여성들은 마음대로 ‘위안소’를 떠날 수 없었고 기본적인 이동이나 생활도 통제를 받았으며, 이러한 성노예들을 일컬어 “천황이 하사한 선물”, “위생적인 공중변소”라고 표현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현지에서 버려지거나 폭격으로 사망, 혹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고난에 직면해야 했으며 귀국을 포기하는 사례도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당한 구타와 고문, 성폭력 등으로 평생 치유하기 힘든 신체적 고통을 겪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여러 심리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당시 가부장적 시대상에 기반한 주위의 시선과 편견에 맞닥뜨려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계기는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이며 윤정옥 교수가 처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후 여성단체들이 연대해 1990년 11월 1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여 일본정부를 향해 문제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관여 사실을 부인했고, 이에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세상과 단절된 채 침묵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내를 비롯한 국제사회에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향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성노예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많은 생존자들은 많은 국내, 해외 시민들과 손잡고 동행하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정부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기 시작했고, 세상을 향해 명예와 인권 회복을 외쳤으며, 자신과 같은 피해를 겪는 사람이 없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 아래 여성 인권·평화 운동가로 거듭나 활동하였습니다.